"성냥도 못만들던 나라가 세계11위로… 오! 대한민국"광복 60주년 특별 기획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 이야기’의 마지막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광복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민초(民草)들이 겪은, 특별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처절했을 수도 있는 보통 사람들의 체험담도 실어 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많았고 제보도 잇따랐습니다. 지면 사정상 그 요구를 다 반영하지 못하는 점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 ◇한계주(韓季珠·1931년 경북 청도 출생) 초등학교 때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겪었고, 중학 2년에 광복을 맞았다. 일제 말
◇축구원로 홍덕영씨가 서울 옥수동 자택에서 유은영 조선일보 인턴기자(숙명여대)에게 축구 인생을 들려주고 있다. /허영한기자 young.chosun.com"48년 스웨덴戰 48개 슛 막느라 가슴이 얼얼 요즘 후배들 정말 잘해… 월드컵4강 운 아냐" 광복 후 한국 대표 축구팀의 첫 번째 해외 원정(1947년), 첫 번째 올림픽 출전(48년), 첫 번째 월드컵 본선 출전(54년)에서 골문을 지킨 수문장 홍덕영(79)씨. 한국 축구의 산증인으로 김용식, 거스 히딩크 등 6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홍씨의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강제징용에 시달리다 광복 직후 귀국선에 올랐다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라는 의문의 사고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최석준씨가 박현경(전남대 인류4)씨에게 60년 전의 끔찍했던 징용생활과 폭침사건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암=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일왕(日王) 항복했는데도 죽창 들고 계속 일시켜 뒤늦은 귀국선 폭발…징용자 대부분 숨져1945년 8월 22일 밤 10시 일본 아오모리(靑森) 현해군기지에서 징용 한국인 수 천 명을 태운 4730t급 수송선 우키시마(浮島)호가 부
◇민병훈씨가 하지연 조선일보 인턴기자에게 광복 직후 조선·동아 복간 당시 언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권민정 인턴기자·고려대 체육교육4년"일제에 희생된 신문이 세상에 나온다 김구·홍명희 등 축사·축하휘호 보내"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는 40년 8월 10일 강제폐간당한 후 첫 신문을 냈다. 이날은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날이기도 했다. 타블로이드판(현재 신문의 절반 크기) 앞뒤 2면뿐이었지만, 복간 이틀째 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 ‘김구 주석 일행 이십삼일 오후 금의환국(錦衣還國)’이라고 광복의 기쁨을
"김일성이 초상화 그려달라 부탁… 그림 그릴 자유 찾아 월남했지"교사로 취직하니 선생들 좌우 편갈라 싸움만 미술계도 대립심각 '좌우합작 단체'만들기도 국방부 종군화가 부단장땐 시체·탱크만 그려 노화가가 사는 서울 광화문 오피스텔 창 밖으로 인왕산이 보였다. 이젤에는 며칠 전 완성한 인왕산 그림이 놓여 있었다. “겸재 선생도 인왕산을 그렸지. 저 산은 우리나라 역사를 내려다 보고 있어. 그 역사성을 느끼려고 여기 살고 있다고.” 김병기(89) 화백. 평양서 태어나 일제강점기-광복-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화가로 살았다. 일찌감
"서울대 설립 반대파 우산들고 강의실 쳐들어와 장리욱 학장이 ‘나를 쳐라’ 호통치자 물러갔지" “1946년 9월 중순이었어. 입학 등록을 하려고 (서울) 동숭동을 찾았는데 글쎄 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에 수십 명이 늘어서 ‘등록하면 매국노’라며 시위를 하고 있지 뭐야. 그때 어딘가에서 5~6명의 젊은이들이 ‘등록을 막는 자가 신탁 통치 찬성파냐? 누구냐’고 소리치며 나타나더라고. 학교 입구에 있던 등록 거부파들이 움찔하더군. 한동안 긴장감이 고조됐지.” 설립된 지 한 달도 채 안 된 국립서울대는 등록 초기부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학생
"한국신문 빠짐없이 번역… 미정책토대 됐지 맥아더가 日이 아시아 맹주라고 해 격분도" ◇일본 도쿄의 미 극동군 사령부(맥아더 사령부)에서 판문점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 전속돼 근무하던 시절의 박철언씨(왼쪽) “영어가 우리나라에서 그때만큼 희소가치를 누리던 때가 또 있었을까. 수많은 석학(碩學)과 재사(才士)들이 울분의 삶을 살던 때에 나는 쥐꼬리만한 영어 지식으로 합당치 않은 황금기를 누린 것 같다.” 해방되던 해 20살 청년이었던 박철언(朴哲彦·79)씨는 영어 실력 덕분에 미 군정청에 취직해 1년간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밀항
"노동자천국 외친 좌파노조 초반 기세 찬탁·46년총파업 실패후 민심 떠났지" ◇이찬혁 한국노동문제연구원장이 서울 영등포동 한국노총 서울지역본부에 세워져 있는‘한국노동운동 발상지(發祥地)’사적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 황정은기자 “광복 후 2년간은 전국적으로 좌우익 노조 간에 거의 매일 전쟁이 벌어졌어. 처음엔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노동자 천국’이란 구호를 내건 좌파 노조가 기세를 올렸지. 하지만 그들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1946년 9월 총파업에 실패한 이후로는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어.”196
"만주·청진·평양으로… 40일씩 연극다녔지부민관서 인기공연하면 덕수궁까지 줄섰어" ◇연극계의 원로 황정순씨가 고려대생 조중렬군에게 해방의 기쁨과 좌우대립. 전쟁의 혼란 속에서 보낸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1945년 8월 15일 원로배우 황정순(黃貞順·80)씨는 어머니(박순여·1961년 작고)를 모시고 고향집이 있던 경기도 소사에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모녀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간이역이었다. 혹시나 징용 나간 두 살 위의 오빠가
"나라부터 만들자… 학업대신 군에 투신 일본 군복 잘라입고 신념 하나로 지켜냈지"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구리묵동 전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 자리(지금의 태릉 육군사관학교). 단 이틀 동안 모집한 병사 225명이 도열한 가운데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 A 중대 입대식이 열렸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이후 39년 만에 우리 민족의 정식 군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미 군정청 ‘대나무 계획(Bamboo Plan)’에 따라 창설된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의 모체였다. 당시 창군 과정에 직접
◇선우진씨는“백범 선생은 일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민족지도자”라고 말했다. 액자 속 사진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찍은 것이다. 백범 왼쪽이 선우진씨, 오른쪽은 김구의 아들 김신씨. 조인원기자join1@chosun.com "백범은 자리 연연않고 나라에 헌신. 국부는 이박사밖에 없다고 하셨어" “백범 선생이 이(승만) 박사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요? 아니에요. 선생은 외교적 수완이 좋은 이 박사가 초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어디 가든지 얘기하셨어요.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환영식을 할 때
◇ 해방 직후 5년간 북한체제를 고스란히 겪은 신인섭교수의 증언이 이어질 때마다 조선일보 인턴기자 신미경(전남대 의류학과 4학년)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그게 정말이냐”는 질문을 반복했다. 이명원기자mwlee@chosun.com"이놈 하던 친구가 갑자기 동무라 불러 너무 우스웠어" 1945년 8월 24일 평양역 광장. ‘위대한 해방군’ 소련군을 맞이하는 평양시민들의 환영행사에서 ‘올드 랭 사인’에 맞춘 애국가 연주가 끝난 후 낯선 러시아 곡 연주가 시작됐다. 평양 장대현교회 김화식 목사의 아들 김동진이 편곡한 이 노래는 평양사범
"여운형, 외모·말솜씨 뛰어나고 기개 넘쳐좌우합작 도모 '척추가 없다' 비난 받기도" 1945년 광복이 찾아오자 국내외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 중에서도 초기 정국을 주도한 인물은 몽양(夢陽) 여운형(?運亨·1886~1947)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며 일제 말 ‘건국동맹’이란 지하조직을 만들었던 몽양은 이를 기반으로 재빠르게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다. 하지만 건준이 조선공산당 등에 의해 좌경화되고, 좌·우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1947년 몽양이 암살되는 바람에 그는 오랫동안 ‘좌파’로 분류되면서
◇김정일이 측근들에게 선물한 고급 승용차. 김정일 생일(2월 16일)을 의미하는 '2·16-' 번호판이 붙어 있어 그가 선물한 차량임을 보여준다. /후지모토 겐지·'김정일의 요리사'김정일은 군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선물을 자주 준다. 절대 권력자다운 행동이다. 그는 어떤 선물들을 누구에게 어떻게 줄까.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다. 파티장 입구에 지름 2m짜리 커다란 공이 매달려 있었다. 파티가 절정에 달했을 때 김정일이 갑자기 전자총을 뽑아들었다. 총을 쏘자 공이 터지면서 안에 담겼던 선물이 쏟아졌다. 파티 참석자들이 서로 선물을
2002년 3월 13일자 노동신문 2면에는 갑자기 10년 전 얘기가 실렸다.“1991년 위대한 수령님(김일성 주석)께서는 몇몇 중요 군사일꾼들을 불러 ‘만약 우리가 (미국과 전쟁에서) 지면 어떻게 하겠는??箚?질문하시였다.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때 ‘수령님 제가 대답하겠습니다’라며 일어서신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는 ‘수령님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 공화국이 지는 경우에는 지구가 깨어져 망할 때입니다’라고 말씀드리시였다”이후 평양 서성구역 연못동 3대혁명전시관 제2관에는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없습니다. 김정일’이라고 쓰
◇동부전선 방문 김정일의 97년 4월 강원도 동부전선 1211고지 방문 때 찍은 사진. 김정일이 감시초소에서 현지 지휘관으로부터 상황 설명을 듣고 있다. 북한 화보 '조선'1996년 2월 동해에 인접한 비무장지대(DMZ) 내 강원도 월비산 지역. 보초를 서고 있던 우리 군 사병이 망원경으로 북측을 감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북한 군인들에 둘러싸여 북쪽에서 남쪽을 관찰하는 김정일을 발견했다. 김정일도 같은 시간 남측 초소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전방에서 근무 중인 우리 군 관계자들은 “김정일은 휴전선 부근을 자주 시찰한다”며 “그러나
◇장성들의 충성맹세 인민군 고위장성들의 충성 맹세 모습. 김일성 주석의 93회 생일(4월 15일)을 앞둔 12일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고위 장성들이 김정일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고 있다. 이 궁전에는 김일성 시신이 안치돼 있다. 북한 화보'조선'1980년대 중반 인민군 총참모장 오극렬(현재 당 작전부장) 대장이 군 개혁안의 결재를 요청했다. 인민군대 내의 정치기관 폐지가 담긴 것이다. 오 대장은 인민군 지휘계통이 군정(軍政)과 군령(軍令)으로 이원화돼 있어 유사시 기동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군정계통을 없애자는 것이었다.김정일
2004년 4월. 평양에서는 천정부지로 치솟던 남한드라마와 외국영화 DVD·비디오 테이프 가격이 뚝 떨어졌다. 개당 2000원을 넘던 것이 100원대로 폭락했다.북한당국의 포고령 때문이다. “남한영화 보는 자, 비디오기기(VTR)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관계기관에 등록하지 않은 자를 엄단한다”는 내용이었다. ‘북한판 한류’였던 한국 영화·연속극 열풍은 겉으로는 급속히 식었다. 실제로는 지하로 숨어들었다.작년 여름 탈북한 이명호(가명)씨는 한국과 외국 영화가 2002년부터 밀려들었다고 했다. 밤만 되면 친구·가족이 모여 남조선 영화보는
“우리 김정일 위원장님이 비를 맞고 계신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연주를 하지 않겠다”. 2001년4월20일 서울에 온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한 단원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하 김정일)의 사진이 있는 포스터가 비를 맞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1999년 2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후쿠이(福井)와 시마네(島根) 해안에서 북한군 15명의 사체가 발견됐다. 1998년 11월 북한의 강원도 고성에서 부식을 구하러 출항했다가 폭풍을 만나 변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조난 직전
김정일은 자신의 영화문헌고를 가지고 있다. 공식 명칭은 ‘국가영화문헌고’다.평양시내 한복판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다.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다. 사실상 김정일 개인의 소유물이다. 1961년 처음 만들어졌다. 70년대 초에 김정일이 확장, 개편했다.정문은 늘 육중한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외부와 차단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주민들은 이런 곳이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이곳에 보관돼 있는 영화 필름은 3만여편 정도로 알려져 있다. 스틸사진도 1만5000여장 정도 된다. 동서양과 선·후진국 가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