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들은 ‘유관순’을 잘 모른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1983년에 발간한 ‘백과전서’에서도 유관순은 찾아 볼 수 없다가 1999년에 나온 ‘조선대백과사전’에서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민족지도자 33인의 역할도 형편없이 평가절하되어 있다. 일제에게 민족의 독립을 구걸한 나약한 부르주아지로 인식돼 있다.

북한에서는 3·1 반일시위를 주도한 것은 평양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이 일찍이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반일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조성해 놓은 평양숭실학교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반일시위가 촉발됐다고 말한다. 김형직은 평양숭실학교를 중퇴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3·1운동을 연결시킬 근거나 자료는 없다. 그럼에도 북한은 그에게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민족지도자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북한은 1919년 3월 1일 반일독립만세 시위의 첫 봉화가 타오른 곳도 서울의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이날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수천 명의 각계각층 군중들이 장대재(현재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에 있던 숭덕여학교 운동장으로 물밀 듯이 모여들었으며, 오후 1시가 되자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청년학생 대표가 단위에 뛰어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난 것은 시간적으로 평양보다 조금 뒤의 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청년학생들이 부르주아 상층분자들의 투항주의적 행동을 박차고 반일항쟁에 떨쳐 나섰다고 말한다. 시위를 주도한 33인 지도자는 "민족대표"를 자처하고 나서 민족의 존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독립을 청원하면서 국민들에게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을 설교한 ‘못난 인물’로 폄하돼 있다.

3·1운동에 대한 북한의 역사서술(‘조선전사’ 등)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존재와 역할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3월 3일 만경대일대의 주민들은 열렬한 반일혁명투사이신 강진석의 지도아래 남녀노소할 것없이 모두가 한결같이 떨쳐나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평양으로 힘차게 전진하였다. 이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여덟살 되시는 어리신 몸으로 거족적인 반일인민봉기 대렬에 참가하시여 보통문까지 갔다.”

3·1운동에 대한 북한의 역사적 평가는 한결 냉혹하다. 한마디로 실패였다는 것이다. 실패의 원인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해낸 교훈이 이채롭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탁월한 수령의 영도,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었다는 점과 무장한 원수들과는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여기서 탁월한 수령은 김일성, 혁명적 당은 그가 이끄는 노동당을 지칭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이런 주장은 김일성과 노동당이 존재하기 이전의 모든 역사는 무의미하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도 다분히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투쟁을 염두에 둔 주장으로 비쳐진다.
/김광인기자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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