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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북한군, 동생은 중공군 막다 숨져… 73년 만에 만난 6·25 형제

기사승인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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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묘역 옆에 안장된 형 -  6·25전쟁에 함께 참전한 ‘호국 형제’ 고(故) 김봉학·성학 일병의 묘비가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51년에 전사한 김봉학 일병의 유해는 2016년에 수습됐고, 정부는 올 2월 신원을 확인해 이날 그의 동생 묘역 옆에 안장했다. 1950년 12월 전사한 김성학 일병 유해는 수습이 바로 돼 1960년 지금 자리에 안장됐다. 73년 만에 두 형제가 유해로 상봉한 것이다. /대통령실
 
동생 묘역 옆에 안장된 형 - 6·25전쟁에 함께 참전한 ‘호국 형제’ 고(故) 김봉학·성학 일병의 묘비가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51년에 전사한 김봉학 일병의 유해는 2016년에 수습됐고, 정부는 올 2월 신원을 확인해 이날 그의 동생 묘역 옆에 안장했다. 1950년 12월 전사한 김성학 일병 유해는 수습이 바로 돼 1960년 지금 자리에 안장됐다. 73년 만에 두 형제가 유해로 상봉한 것이다. /대통령실

6·25 전쟁에 함께 참전해 인민군·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호국 형제’ 고(故) 김봉학·김성학 일병의 유해가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 나란히 묻혔다. 형은 1951년 8월 북한 인민군을, 동생은 1950년 12월 중공군의 남진(南進)을 막다 산화했다. 동생 유해는 금세 찾아 1960년 서울현충원에 안장됐지만 형의 유해는 2016년이 돼서야 수습되고 신원도 올 2월 확인됐다. 형은 68회 현충일을 맞은 이날 윤석열 대통령, 이종섭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에 동생 묘역 옆에 안장됐다. 참전 73년 만에 형제가 극적으로 재회한 것이다. 국방부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청춘과 생명을 바친 한집안의 형제가 늦게나마 넋이 돼 만났다”면서 “우리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국방부와 유족들에 따르면, 형 김봉학 일병은 1923년 9월 10일 대구 서구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 아래에서 3남 4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생계가 여의치 않아 학교에 다니지 않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농사일, 가내 수공업 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다 스물일곱이 되던 1950년 6·25가 터지자 두 달 만인 8월 자진 입대했다. 고인의 유족인 남동생 김성환(81) 옹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그때가 호적상 말고 실제 내 나이가 당시 12살쯤 됐는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던 큰형님이 입대하겠다고 해서 다들 놀라고 말렸다”면서 “하지만 형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고인은 부산 제2훈련소로 입대했으며, 훈련을 마친 뒤 육군 5사단에 배치됐다.

둘째인 김성학 일병은 형을 따라 그해 11월 입대했다.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가 한 달 만인 10월 중공군이 26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개입하면서 다시 국군과 연합군이 열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김옹은 “아들 셋이 있는데 장남에 이어 차남까지 ‘이대로 있을 순 없다’면서 전쟁터로 뛰어든 것”이라고 했다. 김성학 일병은 대구 제1훈련소에 입대했으며 육군 8사단 21연대에 배치됐다.

/그래픽=박상훈
/그래픽=박상훈
/그래픽=박상훈
/그래픽=박상훈

두 형제는 석 달 간격으로 입대해 각자 5사단, 8사단 소속으로 가장 치열한 시기 북한군·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당시는 병사들끼리 전화는 물론 편지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사료에 따르면, 형 김봉학 일병은 1년간 강원도 일대에서 4개의 전투에 참전했다. 김 일병은 1951년 2월 강원 횡성 전투를 비롯해 그해 3월 강원 평창 태기산 전투, 5월 강원 인제 전투에서 최전선을 지켰다.

국군과 연합군은 강원 양구에서 전세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1951년 9월 이른바 ‘피의 능선’ 전투였다. 국군 5사단과 미군 2사단이 힘을 합해 북한군 2개 사단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과 미군은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반면, 인민군은 1개 사단 이상의 대규모 사상자를 냈다. 당시의 격전 상황은 미 종군기자들이 ‘피로 얼룩진 능선’(Bloody Ridge)으로 보도할 만큼 치열했다고 한다. 김 일병은 이 전투에서 끝내 전사했다. 고인의 유해가 수습되기까지 65년이 걸린 것은 유해가 세 지점에 각각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군 관계자는 “얼마나 당시 전투가 치열했고, 얼마나 고인이 앞장서 몸을 던졌는지를 짐작게 한다”고 했다.

동생 김성학 일병은 1950년 입대하자마자 평안남도 순천 일대까지 진격하는 전투에 참전하며 전과를 올렸지만 그해 말 형보다 일찍 전사했다. 12월 24일 강원도 춘천에서 38도선을 향해 내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벌이다 총탄에 숨을 거둔 것이다.

유족인 김옹은 “형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꺼이꺼이 울던 부모님 울음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면서 “20여 년 전 부모님들이 돌아가실 때 먼저 하늘나라 간 자식들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이들 부모는 둘째 아들이 1960년 현충원에 안장될 때는 함께 했지만, 장남의 유해는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옹은 “올 2월 첫째 형님의 유품과 신원확인서를 국방부로부터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면서 “죽어서도 사무치게 그리워할 두 형님을 넋이라도 한자리에 모실 수 있어 꿈만 같다. 부모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노석조 기자 @chosun.com

<저작권자 © NK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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