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추진하는 종전 선언에 대해 나는 필부의 눈높이에서 막연한 생각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먼저 이게 임기 말 업적 세우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임기 초인 2018년 세 차례나 열린 남북 정상회담 결과가 이제 보니 실망스럽네, 북한이라는 나라는 역시 못 믿을 나라군, 하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외교력의 한계도 절감한다. 정상회담의 흥분이 차갑게 식는 데 불과 3년도 걸리지 않았다. 남북 관계라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며, 이벤트와 분위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는 별로 없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므로 만약 종전 선언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그 선언이 약속해주는 바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여긴다.

 

휴전 상황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기괴한 상태이고, 6·25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제 그만 매듭지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있다. 여론조사에서 종전 선언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한 이 상당수는 나와 비슷한 정도로 인식하지 않을까. 다른 문항을 살펴보면, 남북 관계 전망에 대해서도,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심드렁한 응답이 많다. 동시에 나는 북한은 못 믿을 나라이므로, 종전 선언을 하건 안 하건 안보 태세는 언제나 튼튼히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전 선언이 주한 미군 철수의 핑계가 되는 일을 우려한다. 종전 선언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까? 내가 북한이라면 절대 안 한다. 마지막 남은 협상 카드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에겐 핵우산이 필요하다.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만약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이 어찌어찌 이뤄진다면 그다음에는 북한에 전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25는 김일성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며, 그로 인해 100만명 이상이 끔찍하게 죽었다. 그리고 지금 북한의 통치자는 김일성의 적통임을 자랑한다.

한편 나는 북한과 교류 협력하거나 북한을 지원하는 일을 지지한다. 이걸 모순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도 그들이 전쟁 범죄를 더 깊이 사죄해야 한다고 본다.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한국과 일본이 더 친해지기 바란다. 이게 모순인가? 다만 북한은 정상이 아닌 나라이고, 대치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선택지가 많지 않음은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따로 있다. 민주 평화 세력을 자처하는 시민사회 진영이 자신들을 정부 당국자와 동일시하면서 전쟁 책임이나 북한 인권 문제에 말을 삼가는 모습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공무원이 말하기 힘든 얘기를 시민사회가 활발히 대신해 주면 정부의 운신 폭도 넓어지고, 우리의 외교적 영향력에도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내가 몸담은 한국 문학계를 예로 들면,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한 문인 단체 5곳이 지난해 종전 선언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런데 이 단체들이 북한 인권 관련 성명을 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세계 최악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는 반인권 국가에 대해 유엔은 매년 결의안을 채택하고 비판하는데 한국 작가 단체들은 침묵한다.

‘남북 관계의 특수성, 특수한 상황’ 때문인가. 통일부가 올해 발간한 ‘2021 북한 인권 알아가기’라는 책자에는 그런 표현이 되풀이해서 나온다. 나는 북한 같은 거대한 악 옆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특수한 도덕적 의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특수한 상황 앞에서도 보편 가치를 주장해야 하는 책무다. 1930년대 독일 지식인들에게는 그런 의무가 있었다. 인생이 도덕적 책무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며, 도덕에 짓눌리는 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덕적 책무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들을 굉장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기견 구조 단체가 아니라 북한 인권 단체를 후원한다.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그런 순서여야 할 것 같다.

북한이라는 나라 옆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이 북한의 존재를 제 권력 유지 도구로 이용하는 바람에 한국의 이념 지형은 몹시 왜곡됐다. 거기 휘둘리지 않는 세계 시민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 장소, 이 문화, 이 언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책임감도 필요할 것 같다. 북한을 제일 잘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한국인이다. 종전 선언 추진 기사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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