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북한 정부를 상대로 재일 교포 북송 사업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렸다. 가와사키 에이코(79)씨 등 탈북 피해자 5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도쿄재방재판소 정문을 통과하고 있다/도쿄=최은경 특파원
 
14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북한 정부를 상대로 재일 교포 북송 사업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렸다. 가와사키 에이코(79)씨 등 탈북 피해자 5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도쿄재방재판소 정문을 통과하고 있다/도쿄=최은경 특파원

“오늘 재판은 역사적인 재판입니다. 일본 법정에서 북한 정부를 상대로 한 최초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14일 오전 10시,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 103호실에서 변호인 구두 변론이 ‘오늘은 역사적인 재판’이라는 말로 시작됐다. 피고인 측 자리 4석은 텅 비워둔 채였다. 이날 재판에 출석해야 했던 피고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피고 대표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었다. 재일 교포 북송(北送) 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갔던 탈북자 5명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를 제기한지 약 2년 10개월 만에 첫 정식 재판이 열린 것이다. 원고인 변호를 맡은 후쿠다 겐지 변호사의 말처럼 북한 정부를 일본 법정에 피고로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와사키 에이코(79)씨를 포함한 탈북자 5명은 지난 2018년 12월 “북한 정부의 ‘북한은 지상 낙원’이라는 허위 선전에 속아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인권을 억압당했다”며 북한에 총 5억엔(약 51억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냈다. 1959~1984년 이뤄진 이른바 ‘재일 교포 북송 사업’을 북한 정부의 계획적인 납치·유괴 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다. 당시 재일 교포와 그 가족 9만여명이 가난과 차별을 피해 북한 이주를 택했다가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끌려온 재일 교포를 한반도로 돌려보낼 기회로 보고 이를 암묵적으로 지원했었다.

이날 재판정에 출석한 가와사키씨 등 원고 5명은 모두 1960~1970년대 ‘북한에선 차별 없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는 북측의 허위 선전을 믿고 북한에 갔다가 2000년대 탈북한 사람들이다. 가와사키씨 등은 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소를 제기한 지 4개월 뒤인 2018년 12월 소장을 내 더욱 큰 주목을 모았다. 이날 열린 첫 재판 역시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이 100명 가까이 몰려 추첨을 통해 50여명을 선발해야 했다.

14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 앞에 시민 100여명이 방청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도쿄=최은경 특파원
 
14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 앞에 시민 100여명이 방청 추첨을 기다리고 있다./도쿄=최은경 특파원

첫 심문에 나선 가와사키씨는 고령을 고려해 증언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약 40분간 북한에서의 생활을 진술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교토에 소재한 조선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매일 같이 “북한은 지상낙원” “북한에선 배불리 먹으며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교사들의 말을 듣다 북한행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게 시작이었다. 하지만 북한 청진항에 모인 북한 주민을 본 순간부터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북송사업 선전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아사자가 속출하는 북한에서 어렵게 살림을 꾸리다 결국은 탈북을 감행한 일까지 털어놨다.

가와사키씨는 긴장한 듯 무릎에 양 손을 올려두고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30분간 또렷한 목소리로 증언을 이어갔다. 하지만 북에 남겨둔 손자 이야기를 시작한 뒤엔 끝내 고개 숙여 울음을 터트렸다. 손자가 군에 입대한 뒤 상관들로부터 ‘일본에 사는 할머니에게 금품을 받아다 상납하라’는 요구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말하며 그는 몇번이나 왼팔로 눈물을 훔쳐냈다.

가와사키씨는 “북한 정부를 대상으로 소를 제기한 목적은 두 가지”라고 호소했다. 북송 사업으로 이주한 재일교포와 그 가족 9만여명의 2·3세가 목숨을 건 탈북 없이 정정당당하게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북에 남아있는 자신의 자녀 네 명과 손주 5명을 살아서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국제법상 통용되는 ‘주권면제’ 원칙상 타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통상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재판부는 북한이 국제적으로 미승인 국가라는 원고 변호인단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정식 재판을 열었다. 이 때문에 일본 재판부가 앞으로 북한 정권에 유죄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거론된다.

지난 20년간 북송 사업 피해자의 법적 투쟁 등을 지원해 온 야마다 후미아키 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는 “북한 정부를 대상으로 법적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린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며 “오늘 재판을 계기로 북송 사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한 정부의 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