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9일 북한 노동당 제8기 제2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겸 국무위원장./노동신문 뉴스1
 
2021년 6월 29일 북한 노동당 제8기 제2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겸 국무위원장./노동신문 뉴스1

《월간조선》은 고위 탈북자로부터 화폐개혁의 책임을 지고 총살당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경제부장의 시체를 김정은의 지시로 용광로에 던졌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북한 정보는 ‘가짜 뉴스’일 경우가 많다. 북한 문제는 당사자의 반론이나 반발이 즉각 전해지지 않는 특수성을 노린 익명의 취재원들이 ‘카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그럼에도 이 탈북자의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는 오랜 시간 겪어 보고,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 북한을 떠난 이 탈북자는 소위 ‘미공개 고위 탈북자’다.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 지난 정부 국정원 슈퍼컴퓨터에 저장됐었던 그의 이력을 보면 왜 그가 왜 ‘비공개 탈북자’로 살아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탈북자는 박근혜 정부의 요청으로 100페이지가 넘는 ‘김정은’과 관련한 리포트 작성할 정도로 북한 고급 정보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남기는 1986년 12월 인민 경제를 총괄하는 국가계획위원장에 발탁된 이후 24년간 북한 계획경제를 최일선에서 지휘한 거물이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죽기(2011년 12월) 1년 전쯤인 2010년 9월 28일 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로 ‘책봉’됐다. ‘공식’이 2010년이지, 비공식적으로는 2009년 초부터 후계자 역할을 했다.

2002년 10월 26일  북한 경제시찰단 단장으로 방한 당시 박남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연합뉴스
 
2002년 10월 26일 북한 경제시찰단 단장으로 방한 당시 박남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연합뉴스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2009년 11월 30일 오전 10시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과 내각 결정 423호 “새 돈을 발행함에 대하여”를 공표, 화폐 교환사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렸다. 김정은은 1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통해 ‘돈주’들의 시중 자금을 강탈했다.

당시 화폐개혁은 이전의 다른 화폐개혁과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현금과 예금의 교환 비율이 현금은 100 대 1로 100원이 1원으로 바뀌지만, 예금은 10대 1로 10원이 1원으로 대체된다. 예금자보다 현금을 대량으로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구조다. 또 1가구당 15만원(새 돈 1500원)으로 교환 한도를 두어, 15만원을 넘어가는 돈은 1000대 1로 바꿔주고, 모두 은행에 예치하도록 했다. 부(富)의 재분배와 은닉자금의 노출을 동시에 노린 조치다. 김정은이 사실상 시장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해온 주민들의 재산을 몰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본인의 공식 책봉을 앞두고 장마당을 장악한 ‘시장 세력’의 확대를 막을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섣부른 ‘개혁’은 물가 폭등과 장마당 마비를 불러왔다. 화폐개혁 후속 조치로 시장을 폐쇄하고 달러 사용을 금지하자 국가기관·기업소 등의 운영이 줄줄이 중지돼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했다.

악화한 민심이 나아지지 않는 데다 실패를 수습할 수단도 없었던 김정은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양이었다. 당시 김정각(2018년 4월 22일 황해북도에서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숨진 버스 추락 사고로 북한 인민군 서열 1위 총정치국장에서 해임)은 김정은의 최측근이었다. 가까이서 김정은을 보좌했다. 김정은이 북한 통치를 시작한 직후인 2009년 4월 국방위원으로 임명됐다. 김정각의 ‘눈엣가시’가 있었으니, 박남기였다.

노동당 재정계획부장이었던 박남기는 군부가 운영하는 외화벌이 회사들을 노동당으로 통폐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총정치국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박남기 세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 이권에 큰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다.

김정은 최측근인 김정각은 화폐개혁의 실패 원인을 박남기에게 뒤집어씌워 그를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와중에 박남기는 김정일의 면전에서 화폐개혁 이후 상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김정일은 대로했다. 김정은도 마찬가지였다. 희생양이 박남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2010년 3월 “만고역적 박남기를 처형한다”고 선고했다.

3월 10일 북한 국방위원회는 예고 없이 노동당 부부장급, 각 성 부상급 이상 고위층들을 집결시켜 버스에 태운 뒤 평양 순안구역에 있는 강건군관학교(우리의 육사에 해당)로 데리고 갔다. 강건군관학교는 일반인에게 공개할 수 없는 공개처형이 이뤄지는 곳이다.

군관학교 사격장에는 박남기가 묶여 있었다. 한 목격자는 “박남기 부장은 보위부에 얻어맞아 얼굴이 부은 상태에서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박남기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리한 화폐개혁을 단행해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이는 ‘민족반역죄’에 해당된다”고 발표하고 9발의 총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 박남기는 " 자신은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아 당에 감사하는데 김정은 저놈은 안된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유성옥 진단과 대안 연구원장은 2014년 3월 11일 새누리당 의원이었던 김무성 전 대표가 주최한 통일경제교실에 강연자로 나서 김정은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박남기의 유언에 격분해서였을까.

김정은은 “박남기를 남포 용광로에 던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화폐(돈)개혁에 실패했으니 돈(동전)을 만드는 용광로에 넣어 뼈 한 조각, 살 한 점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부관참시였다. 이 장면은 북한 최고위급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남기 시체를 어느 제철소 용광로에 던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증언을 한 고위 탈북자는 “최고위층으로부터 남포 용광로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다만 남포에는 2개의 제철소가 있다. 하나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이고, 다른 하나는 보산제철소다.

두 곳 중 한 곳의 용광로에 박남기 시체를 던졌다는 것인데,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산제철소 보다는 천리마제강 용광로일 가능성이 크다고 북한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천리마제강은 1956년 시작된 김일성의 천리마운동의 발원지이다. 천리마운동은 1956년 12월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선제강소(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의 옛 이름)를 방문하고 같은 달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이 제기된 다음 해인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공업총생산량이 매년 평균 36%씩 성장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은 세습 직후부터 천리마제강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2013년 4월 19일 《노동신문》 1면에 ‘강선이 지펴올린 증산투쟁의 불길이 온 나라에 타 번지게 하자’는 제목의 사설이 대표적이다.

사설은 “강선에서 타오른 불길은 새로운 주체 100년대 진군의 힘 있는 박차”라고 규정하고 “이것은 또한 우리의 핵무장해제와 제도전복을 꾀하는 미제와 그 추종 세력들의 침략전쟁책동과 ‘제재’ 소동을 자립의 무쇠마치로 짓뭉개버린 역사적 장거”라고 주장했다.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1993년 탈북자들을 공개 화형에 처한 적이 있다.

또 결과론이지만 김정은은 집권 후 일반인이 상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등을 소총이 아니라 대공(對空) 무기인 14.5㎜ 고사총으로 박살 냈다. 우리 국민을 6시간 넘게 바다에 놔두고 조사하다 결국 사살, 소각하기도 했다.

미국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 책에서 트럼프가 “김정은이 내게 말하길 장성택을 죽이고 머리를 다른 사람이 보도록 전시했다”고 말한 게 과장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