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해상에서 표류하던 우리 공무원을 총살 후 불태운 사실이 알려진 24일 여권(與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여당은 지난 6월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에도 남북 철도 연결,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공단 재개 등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야당을 향해서는 4·27 판문점 선언 비준 동의에 응하라고 촉구해왔다. 그러나 북한군이 비무장 상태의 우리 국민을 재판도 없이 사살하고 시신까지 훼손한 사건이 벌어지자 남북 관계가 2008년 금강산 박왕자씨 피격 사건 이후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왔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우리 국민이 북한군에게 야만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란 말 외엔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남북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했다. 추석 민심에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野 “대북정책 총체적 실패” - 주호영(앞줄 왼쪽에서 넷째)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북한의 우리 국민 총살 및 시신 소각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야권은 “북한이 만행을 계속하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 선언을 언급하는 등 정부의 대북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덕훈 기자
野 “대북정책 총체적 실패” - 주호영(앞줄 왼쪽에서 넷째)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북한의 우리 국민 총살 및 시신 소각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야권은 “북한이 만행을 계속하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 선언을 언급하는 등 정부의 대북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덕훈 기자

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이날 오후 국방부 차관을 국회로 불러 긴급 보고를 받았다. 민주당은 이후 입장문을 내고 북한을 규탄했다. 민주당은 “해상에서 표류 중이던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에게 의도적 총격을 가한 후 시신을 불태운 북한군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만행”이라며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했다. 북한의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포로 안 쏜 게 어디냐”고 했던 민주당의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눈과 귀를 의심할 일이다. 백주 대낮에 있을 수 없는 행위”라며 “전쟁 중에 잡힌 포로도 재판 절차 없이 현장에서 사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북한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 등 후폭풍을 의식한 움직임으로 해석됐다.

여권에선 “당분간 남북 협력 등 대북 유화론을 주장하기 어려워졌다"는 전망도 나왔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7월 취임 후 남북 관계와 관련해 “대담한 변화를 만들어내겠다”고 했다. 판문점과 강원 고성 등을 찾아 금강산 관광 재개와 남북 철도 연결에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도 지난 7월 국회 연설에서 비슷한 뜻을 밝혔다. 그러나 민주당 관계자는 이날 “북한이 우리 국민을 살해하고 시신을 처리한 수법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국민적 분노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향해 제안해온 각종 유화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군 당국은 북한이 사살한 시신을 불태운 이유와 관련, 코로나 방역 차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코로나 앞에 ‘제 코가 석 자’인 북한을 상대로 한 현 정부의 남북 협력 카드가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권(野圈)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당 회의에서 “북한은 과거 박왕자씨 피격 사건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게 없는데 문 대통령은 어제(23일)도 (유엔 연설에서) 종전 선언을 운운했다”며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종전 선언을 얘기했는지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야만적 행태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그동안 핫라인 등 소통 채널은 허구였나”라고 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문 대통령은 (우리 국민 피살) 보고를 받은 직후에도 평화를 얘기했다”며 “국군통수권자의 자격이 없다”고 했다.

야당은 정부가 이번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국회 국방위 국민의힘 간사인 한기호 의원은 “문 대통령이 종전 선언 관련 내용을 유엔 총회 연설에 포함했는데 이 연설로 (사건을) 은폐한 정황이 보인다”며 “사건 발생이 21일인데 이것을 공개한 것은 23일이다. 그 사이에 (대통령과 정부가) 무엇을 했는지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문 대통령 유엔 연설을 앞두고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민을 속인 건 아니냐”고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생각 같아서는 북한 관련자들을 전부 서울로 소환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처벌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그게 제대로 된 나라, 나라다운 나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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