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보도 통해 본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 DVD로 소장하겠다"
트럼프 취임 후 성대하게 진행…野서는 "독재자들이 하는 것" 비판
트럼프 독립기념일 하루 전 시위를 "좌파 문화혁명" 비난
美보도 보며 "아침 식사시간 심심풀이로 그만"…조롱 의미 있는 듯
독립기념일 언급 후 김정은이 "트럼프 좋은 성과 있기를"…재선 기원 뜻도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0일 발표한 담화는 11월 미 대선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차 미북정상회담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원고지 29매 분량의 긴 이번 담화엔 지금껏 담화에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 담겨 있다. "끝으로 며칠 전 TV보도를 통해 본 미국 독립절 기념행사에 대한 소감을 전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독립절 기념 행사를 수록한 DVD를 개인적으로 꼭 얻으려 한다는데 대하여 위원장 동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문장이다. 김여정이 'TV보도'를 통해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를 봤으며, '독립기념일 행사를 녹화한 DVD를 소장하겠다'는 것이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2018년 6월 12일 미북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 카펠라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며 밝게 웃고 있다. /백악관 제공

◇김여정, CNN 등으로 'TV보도' 봤을 듯

이 문장에서 먼저 김여정이 언급한 'TV보도'에 의문이 나온다. 북한 관영 TV 방송에서는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를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탈북민인 이웅길 새터민라운지 대표는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는 북한 TV에서 방영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은 볼 수 없다"며 "한국 방송이나 미국 CNN, 중국 방송을 봤을 것"이라고 했다. 탈북민 출신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도 "김여정이 CNN이나 미국 TV를 통해 봤을 것"이라며 "북한 특권층은 요즘 유튜브도 많이 본다"고 했다.

북한의 특권층은 위성방송을 통해 해외 TV채널을 접할 수 있으니, CNN 같은 보도 채널을 봤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여정은 오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어 수준급의 영어 실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여정의 이번 담화는 대외용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서만 소개됐고, 북한 주민이 보는 노동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현지 시각) 백악관 앞에서 진행된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연설 중 손을 흔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최근 며칠간 TV보도, 아침식사 시간 심심풀이로 그만"

그런데 김여정이 왜 '미국 독립기념일 기념 행사'를 언급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과 관련한 연설에서 북한과 관련된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전문가인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여정 발언 속에 미국을 조롱하는 의미가 있다고 봤다. 'TV 보도를 봤더니 미국도 별 것 없는 나라더라'는 뜻을 숨긴 문장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김여정은 담화를 시작하면서 미국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을 했다. "나는 최근 며칠간 미국 사람들이 연일 발신하고 있는 우리와 관련한 괴이한 신호들을 보도를 통하여 듣고 있다. 나중에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시사하게 된 미국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TV보도를 통해 흥미롭게 시청하는 것은 아침 식사 시간의 심심풀이로서는 그저 그만이었다"는 부분이다. TV 보도 프로그램이 아침드라마도 아닌데, 김여정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미국 TV 보도를 보았더니 흥미로워 심심풀이로 좋았다'는 말을 한 것이다.
 
지난 4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진행된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백악관 위로 미 공군이 축하 비행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트럼프, 독립기념일 전후해 북한 언급 안 해

그렇다면 김여정은 어떤 이유로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를 조롱의 대상으로 격하시켰을까.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어, 올해 행사가 많은 논란 속에 치러진 것이 배경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독립기념일(7월4일)을 하루 앞둔 지난 3일, 미 중서부 사우스다코다주의 러시모어산에서 열린 불꽃놀이 행사에 참석해 인종차별에 항의는 시위대를 향해 "역사를 말살하려는 무자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시위대들이 '미국의 영웅'을 기리는 동상과 기념비를 철거하려는 움직임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띤 세력들이 "우리의 영웅들을 헐뜯고, 우리의 가치들을 지우고, 우리의 아이들을 세뇌하고 있다"고 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미국 독립혁명을 타도하려고 고안된 좌파 문화혁명"이라 부르기도 했다. 러시모어산은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에이브러햄 링컨·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전직 미 대통령 4명의 얼굴이 화강암 절벽에 새겨져 있는 미국의 대표적 관광명소다.

북한 매체들은 미국에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발생하는 상황을 관심 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달 3일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반인종주의 시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사회에서 갖은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야 하는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시위자들은 백악관 주변에 모여 경찰들의 인종차별행위에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분노를 터뜨렸다"면서 "경찰들은 최루가스를 쏘아대며 시위자들을 탄압하고 집단적인 검거소동을 일으켰다"고 전했다. 북한이 미국의 인권문제 제기에 불만이 큰 상황에서, 미국에서 일어난 이번 시위는 북한이 미국을 향해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소재로 활용 가능하다. 김여정도 이 점에 착안했을 수 있다.
 
미국 독립기념일인 지난 4일 워싱턴DC에서 시위대가 성조기 문양으로 만들어진 '트럼프 모자'를 불태우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DVD 소장 김정은 허락" 이어 "좋은 성과 있기를"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독립기념일 행사를 예년보다 성대하게 치러왔다. 작년 독립기념일 때는 전투기와 헬기·탱크를 동원한 초대형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이건 독재자들이 하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행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각 지역에서 독립기념일 행사가 취소되는 가운데 백악관에서는 정부 관계자 등 7500명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행사를 강행했다.

김여정은 김정은에게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 DVD 소장을 요청하자 김정은이 이를 허락했다면서 "위원장 동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에서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자신의 인사를 전하라고 하시었다"고 밝혔다. DVD와 재선이 연관돼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 최대 국경일인 독립기념일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 점을 축하하고, 11월에 재선을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가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사우스다코다주에 있는 러시모어산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기념식에 참석해 있다. 뒤에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에이브러햄 링컨·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전직 대통령 4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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