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아닌 A급·B급이냐 중요… 北, 주민이 지도자 못 뽑는 B급
B급 체제를 B급이라 말하면 '색깔론' '친일 잔재'인가
 

이한수 문화부 차장
이한수 문화부 차장

이준익 영화감독이 10여 년 전 조선일보 본사에서 한 강연을 들은 적 있다. 영화 '왕의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넘은 때였다. 이 감독은 영화 플롯에 대해 "비주류가 주류를 조롱하고, 주류가 비주류를 부러워하는 얘기"라고 했다. 질문 시간에 손을 들었다. "주류에도 비주류에도 A급과 B급이 있다. 영화에서 A급 비주류인 주인공 광대가 B급 주류인 연산군을 조롱하는 게 정당한 싸움인가."

비주류라고 무조건 선(善)이 아니고 주류라고 모두 악(惡)이 아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주류든 비주류든, 진보든 보수든 A급이 있고 B급이 있다. 좌파라서 또는 우파라서 문제가 아니라 B급이라서 문제다. '왕의 남자' 주인공이 A급 세종을 상대했다면 플롯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미·북 하노이 회담 과정을 보면서 다시 A급, B급을 떠올렸다. 국가에 등급을 매긴다면 북한은 B급에도 속하지 못한다. 세계 최하위권 경제 수준 때문만 아니다. 정치 체제가 B급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북쪽에서 태어난 주민은 5000년 역사상 한 번도 제 손으로 지도자를 뽑은 적이 없다. 100년 전 3·1운동으로 세운 임시정부가 헌장(憲章) 제1조에서 선포한 민주공화제는 남에서만 이뤄졌다.

해방 직후엔 북에도 정치적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젊은 러시아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는 지난해 낸 책 '김일성 이전의 북한'(한울)에서 "해방 전후부터 김일성이 주민 앞에 나타난 1945년 10월 14일까지 두 달간 북조선에는 독립된 정당과 매체가 많이 있었다"면서 "이 짧은 기간 동안 북조선은 조선인의 것이었다. 이 시기는 북한 역사상 유일한 시기였다"고 썼다.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이 스탈린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키고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정치적 자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김일성이 만든 B급 체제는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7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북이 '빨갱이'라서 문제라는 게 아니다. B급이라서 문제다. 유럽 사회주의 같은 A급이라면 문제없다. 베트남처럼 공산당 중심이라도 지도부가 바뀌는 체제라면 그나마 괜찮다. 북이 주민 자유선거로 미래를 실현할 지도자를 정기적으로 선출하는 체제였다면 지금처럼 B급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 B급을 옹호하지 못해 안달인 분들이 꽤 있다. 현 정권 쪽에 특히 많다. "열차 이동은 탁월한 선택" "담배 피우는 모습이 인간적" "(고생하는 모습이) 좀 짠하더라"고 B급 지도자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것쯤이야 독특한 취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B급을 B급이라 말하는 것에 대해 '대결적 태도' '증오 정치'라고 비난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연민은 북 주민에게 느껴야 옳다. B급 지도자의 '빈손 귀국'은 주민 복리(福利)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다가 맞은 파국이었다. 회담 결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북 주민이다. 어느 친(親)정부 인사는 강경파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재를 뿌렸다면서 미국을 비난했다. 북은 언제나 옳다는 식이다. B급을 옹호하는 일이 스스로를 B급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모른다. B급을 B급이라고 비판하면 악으로 규정한다. '변형된 색깔론'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이준익 감독 영화는 전보다 더 깊어졌다. 영화 '사도'에서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는 선과 악으로 쉽게 나뉘지 않는다. 당연히 필자의 질문 때문은 아닐 것이다. B급을 조롱하는 이 감독 영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A급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4/20190304034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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