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상하지 않고 최대한 오래 먹을 수 있는 파스타 면과 건조된 우유를 사들이고 있다. 화장지, 비누, 생수를 사재기하고 약국에선 만성질환 환자들의 필수 약들이 부족해진다. 북한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던 1970~80년대 대한민국 이야기가 아니다. 2019년 3월 29일 밤 11시 유럽연맹을 탈퇴(일명 '브렉시트')하기로 예정된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유럽과 지중해 주변 모든 영토를 수백 년간 통치하던 로마.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포함해 중남미 대륙을 소유하던 스페인.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제국. 제국을 다스려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제국은커녕 언제나 외부의 침략을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영원한 제국은 불가능하기에 언젠가 모든 제국은 과거의 제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하나 있다. 제국은 사라지지만 제국을 경험한 자들은 제국의 '달콤한' 기억에서 깨어나길 거부한다는 점이다.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일 뿐이라고 주장한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말과 비슷하게 이탈리아와 서유럽의 역사는 로마제국에 대한 추억과 증오와 로망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 중 하나인 '팍스 브리타니카'를 만들어낸 영국 역시 비슷하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식민지들의 독립, 그리고 20세기 여러 경제 불황 덕분에 이젠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제국에 대한 추억만은 여전하다. 화려한 19세기 귀족 사회 영화나 인도인들이 하인으로 등장하는 '식민지 드라마'가 언제나 최고 시청률을 보장하니 말이다.

제국의 과거는 변치 않는 기억의 제국이 되고, 망상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의 제국은 현재에 대한 오만과 착각의 원인이 된다. '영국은 다르다!'는 믿음으로 시작된 브렉시트. 유럽연합을 탈퇴한 바로 그다음 날 아침부터 영국 역시 지극히 평범한 나라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끼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29/2019012903060.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