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五輪 후 10개월 새 7차례 '연쇄 정상회담 쇼' 벌이며
'몸값' 높이는 김정은의 '국가적 사기' 가능성 의심해야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요즘 시중에선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우려와 불신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다가 나라를 통째로 김정은에게 바치는 것 아니냐?" "연방제 통일 되면 한국이 지도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이런 걱정이 터져나오는 이유는, 김정은의 '선의(善意)'를 과신하고 밀어붙이는 정부의 대북 정책이 위태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 믿음대로, 김정은은 정말 비핵화 의지가 있는 걸까? 그의 본심(本心)을 읽으려면, 18년 전 아버지 김정일의 외교 전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정일의 시각'으로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새로운 그림이 나타난다.

2000년 초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은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일본 사업가 요시다 다케시의 도움으로 3월 9일 싱가포르에서 북한 송호경과 비밀 회동하기로 약속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햇볕정책'이 시동을 건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남이 있기 나흘 전, 김정일이 돌연 평양 모란봉 구역의 중국대사관에 나타났다. 조명록·김일철 등을 대동한 그는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대사관에 머물며 완융상 중국대사 환송연을 시끌벅적하게 열어주었다. 이날 밤 김정일이 중국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에 보름 앞서 그는 장쩌민의 초청으로 베이징을 전격 방문했다. 과거 8년간 한·중 수교에 분노한 그가 중국을 외면했던 걸 감안하면 파격이었다. 김정일이 남북회담 카드를 이용해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김정일은 2년 4개월간 중국→한국→중국→중국→일본으로 이어지는 5차례 연쇄 정상 외교를 펼쳤다. 그것은 마치 당구의 '스리쿠션'과 같이, 한 회담이 다음 회담에 영향을 미쳐 북한의 몸값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이 연쇄 외교술의 '총설계자'는 김정일이었다. 그는 6자회담에 응해 비핵화할 것처럼 시간을 끌면서 국제 지원(경수로와 중유 등)과 햇볕정책의 단물을 빨아 경제 위기를 벗어났다. 그리고 몰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가동해 핵 능력을 높였다. 남북 관계가 가장 좋다고 평가받던 노무현 정부 시절, 김정일은 1차 핵실험(2006년)을 단행했다. 그의 화려한 외교쇼는 '비핵화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다.

김정은의 '외교술'은 아버지를 능가한다. 그는 올 2월 평창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을 자극하고 미국을 움직인 다음, 미·중 경쟁 구도를 만들어 6년간 자신을 홀대했던 시진핑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어 10개월간 중국→한국→중국→한국→미국→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7차례 정상 외교의 판을 벌여 자신의 몸값을 극대화하고 한국·중국·러시아의 제재 강도를 무디게 만들었다. 이 '외교쇼의 총설계자'는 김정은이다. 북한은 경제난 탈피를 위해 트럼프를 '협상 지옥'으로 끌어들여 제재 완화의 명분을 만들고, 한국에는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며 거칠게 경협을 다그치고 있다. 입으로는 '비핵화'를 외치고 뒤로는 소형 핵탄두와 중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수법도 아버지와 똑같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화해 협력을 시도한 것 자체는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18년 전과 같은 '국가적 사기극'일 가능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아버지가 '고난의 행군' 때 30만명을 굶겨 죽이고도 포기하지 않았던 핵을, '핵보유국' 지위까지 선언한 아들이 단념할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회담 몇 번, 성명서 몇 장으로 '비핵화'는 달성되지 않는다. 실질적 행동과 철저한 검증만이 최선이다.

북한의 최종 목표는 '미국을 한반도에서 손 떼게 한 뒤, 남한을 핵 무력 앞에 무릎 꿇리는 것'이다. 이것이 북이 말하는 '전쟁 없는 평화통일'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군사 대비 태세가 유지됐으나 현 정부는 그것마저 허물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우리가 하면 다르다"고 자신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감이 크면 클수록, 김정은의 '비핵화 사기극'에 걸려들 가능성도 커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0/20181120036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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