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문화부 차장
신동흔 문화부 차장

지난 주말 동네 세탁소에서 인근 가게 주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떡을 좀 하러 갔는데, 쌀이 없더라고…." "정부 양곡 창고가 텅텅 비었다던데…. 북한에 다 퍼다 준 거 아녀?"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 사이에 '가짜 뉴스'가 퍼지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순간이었다. 정부는 올해 쌀 작황이 나쁜데도 수매 물량을 줄이지 않았다. 쌀값이 오른 것은 당국의 수급 조절 실패 탓이지 북한과는 관련이 없다. 아마 이날은 제주 감귤 200t을 북에 보냈다는 뉴스와 맞물려 '북한 퍼주기' 사례로 불거진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한 친여(親與) 성향 라디오 진행자는 "귤만 보냈겠냐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는 걸 보면, '쌀 100만t 북에 퍼줘 쌀값이 폭등했다'처럼 귤 관련 가짜 뉴스가 돌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한 이른바 '합리적 의심'을 잘 했던 그의 발언에선 이제 '가짜 뉴스쯤이야…' 하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쌀값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또 들었다. 밤늦은 퇴근길 동네 마트에서 비닐봉지에 아이스크림 몇 개 담았을 뿐인데 값이 1만원을 훌쩍 넘길래 "언제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비싸졌어요?" 했더니, 중년 계산원 아주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쌀값은 더 올랐어요" 했다. 지금 한가하게 아이스크림 값 따질 때냐는 투였다.

서민들 살림살이는 날로 팍팍해지고 있다. 퇴근길 지하철역에서는 국산 과자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리는 동남아산 과자를 여럿 사서 집으로 가는 직장인을 종종 마주친다. 최근 한국소비자원 발표를 보면, 지난달 즉석밥 가격이 작년보다 11.3% 오르는 등 설탕·우유·콜라·참기름·밀가루까지 식료품 가격이 많이 올랐다.

모두 서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생활 물가다. 정부는 북한에 퍼다 준 것 없다지만, 물가가 오르니 서민들은 별생각을 다 하고 있다. 본인들은 정작 맛도 못 봤을 올해 감귤을 북에 보냈다는 말에 부아가 치민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여권 사람들은 '가짜 뉴스' 프레임만 씌우면 웬만한 비판을 넘길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으로 힘든 자영업자 기사를 쓰면서 누군가 국내 자영업 폐업률 통계를 인용하면 "한국의 자영업 폐업률은 원래 높았다"는 사실 을 근거로 가짜 뉴스라고 몰아붙인다. '삭간몰 미사일 기지'도 가짜 뉴스 프레임으로 대응했다.

쌀값 걱정하는 서민이나 안보를 걱정하는 국민 '마음'까지 가짜라고 할 텐가. 그런 마음을 자꾸 모르는 체하면 아무리 김정은과 관계가 좋아져도 정부에 대한 불신이 계속 커질 것이다. 고단한 삶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던 마트 아주머니와 세탁소 주인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5/20181115035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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