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낙관적으로보지 않으면 '수구 냉전 세력' '평화 발목 잡기'로
공격받는 세상이 됐지만 용기를 내서 문 대통령에게 묻는다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화기애애한 '판문점 회담'이 있고서 보름도 안 지났을 때다. 북한은 "남조선 당국은 미국과 함께 우리에 대한 공중 선제타격과 제공권 장악을 목적으로 대규모의 '2018 맥스 선더' 연합 공중 전투 훈련을 벌여놓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약속된 남북 고위급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취소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표변(豹變)이 황당했지만 원칙적으로 문제는 우리에게 있었다. 판문점 선언에는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는 조항이 있었다. 한·미 군사훈련은 '적대 행위'에 해당했던 것이다.

당시 여권의 외교 전략통인 이수혁 의원이 "그 조항을 넣기로 합의했을 때 북한은 무슨 계산을 했을 것으로 봤나? 그리고 우리는 무슨 계산을 했느냐"라고 통일부에 질의했다. 통일부에서는 우물쭈물 답변을 못 했다. 그것까지 따져보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합의했다는 뜻이다.

통일부의 안일함을 탓할 것도 없다. 그 전에 대통령 특사로 김정은을 만나고 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어록(語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 브리핑에서 "김정은이 한·미 훈련에 대해 이해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답했던 것이다. 김정은이 이해했다는데, 한·미 훈련을 문제 삼는 북의 돌발 행동은 왜 나온 것일까. 김정은이 그때 거짓말했거나, 김정은이 그렇게 답변을 안 했는데 우리 특사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것 둘 중 하나다.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조성된 한반도 평화는 해빙(解氷)의 봄이 아니라 무성한 여름으로 쑥 들어온 것 같다. 국내 언론에서는 경쟁적으로 '연평도를 포격했던 북한 해안 포대를 폐쇄한다' '군사분계선 일대에 배치된 장사정포를 철수하는 논의를 시작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일반 국민은 '북한이 평화 체제에 대한 진정이 있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과연 북한이 그런 논의에 응했을까. 만약 그랬으면 우리가 먼저 무엇을 양보했을까'라는 의문이 앞선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일부 전문가들이 북·미 회담 결과를 낮게 평가하는 건 민심의 평가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무서운 민심(民心)이 동원되면 일부 전문가들은 자체 검열에 들어갈 것이다. 이 때문에 "전 세계인에게 전쟁 위협, 핵 위협, 장거리 미사일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고 평가해야지, "핵 폐기는 안 이뤄지고 대북 제재는 풀리기 시작했다. 한·미 동맹도 흔들리게 됐다. 북한의 세습 독재 정권과 미국의 선거 정권이 맞붙으면 시간은 북한 편이다. 북한은 시간을 끌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핵 폐기가 아닌 핵 군축(軍縮) 회담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전망하면 위험해진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으면 '수구 냉전 세력' '평화 발목 잡기'로 공격받는 세상이 됐지만, 용기를 내서 문 대통령에게 지상(紙上) 질문을 할까 한다. 미·북 회담 직후 트럼프의 입에서 "돈만 많이 들고 도발적인 워게임인 한·미 군사훈련 중단"이 나왔음에도, 문 대통령은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하며 환영한다"고 했다. 이런 중대 발표에 대해 전혀 상의가 없었다. 미리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지자들 표현으로 '백만불짜리 미소'를 띠었다고 하니 한·미 훈련 중단은 문 대통령이 내심 원하는 바였을까. 그동안 보수 여론의 반발을 의식해 이런 마음을 안 드러냈던 것일까.

한·미 훈련 중단은 주한 미군 철수로 귀결될 수도 있다. 우리 국민은 미군 철수를 받아들일 만큼 김정은의 선의(善意)를 믿어야 하는지, 무엇보다 문 대통령의 목표는 비핵화에 있는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있는지, 관계 개선으로 비핵화가 되고 전쟁이 없어지는지, 핵을 보유한 북한과 공존이 가능한지, 핵무장하지 않은 한국이 한·미 동맹까지 해체됐을 때 어떤 상황에 처할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무가 있는 문 대통령은 정직하게 답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지금 돌아가는 정세는 현 정권의 이익과 맞을지는 몰라도 영속돼야 할 대한민국에는 우호적인 것 같지 않다. 트럼프가 세습 독재자 김정은을 "스마트하고 조국을 매우 아끼는 지도자"라고 했으니, 비핵화에 이견(異見)이 생겨도 대북 제재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 트럼프는 북한 부동산 투자로 돈벌이를 궁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김정은은 이번에 시진핑과 만나 "한 가족처럼 됐다"고 과시했다. 일본도 북한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서있게 되는가.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생전에 "김일성은 한국을 양반이 쓴 갓에 비유했다"고 말했다. 갓을 묶고 있는 두 끈은 한·미 동맹과 한·일 우호 관계다. 갓끈을 잘라버리면 대한민국이란 갓은 바람에 날아갈 것이라는 뜻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1/20180621043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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