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평화 얘기하자 南, 北의 모든 요구 받아들여
"남북 한달새 '甲乙 관계' 됐다" 김정은, 긴장풀고 미소 지을 듯
 

이하원 논설위원
이하원 논설위원

'North Korea plays the South, again.' 얼마 전 뉴욕타임스 아시아판 1면에 실린 칼럼 제목은 최근 남북한 간에 벌어지는 현상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북이 한국을 상대로 또 사기 치다' '북이 다시 한국을 갖고 놀다'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칼럼의 필자는 닉 에버스타트. 미 기업연구소(AEI) 선임 연구원이다. 하버드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마친 수재로 꽤 오랫동안 북한을 들여다보고 있는 인물이다. 워싱턴 DC 근무 당시 만났던 그는 북이 '위장 평화 술책'을 펼 때마다 한국이 당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껑충한 키에 커다란 안경을 쓴 그가 남북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고개를 젓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에버스타트는 이 칼럼에서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윈-윈(win-win) 게임'으로 보지 않는다. 북한이 승리하고 한국은 지는 게임으로 파악했다. 구체적으로 "우리(북한)가'점프'라고 말하면 너희(남한)는 '얼마나 높이 뛸까'라고 물어 봐라"는 게임이 시작됐다고 풀이했다.

그의 분석대로 북의 30대 지도자가 신년사를 통해서 '동계올림픽'과 '평화'를 얘기하자 우리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북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9일 현 정부의 첫 고위급 대화 합의문은 '북 신년사를 표절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정은의 말을 빼다박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오전 9시 30분(평양시 기준 9시)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창 선수단 관련 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예술단 회담'이 먼저 개최되는 희한한 일도 생겼다. 그러더니 17일 열린 실무회담에서는 아예 우리가 먼저 북 마식령 스키장 공동 이용을 제안했다. 이미 지난해 북에 이런 구상을 전달했다고 한다. 마식령 스키장이 어떤 곳인가. 김정은이 리프트를 타고 가는 모습을 북한 매체를 통해 내보낼 정도로 그가 애착을 가진 곳이다. 북의 환심(歡心)을 사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대회가 열리지도 않을 곳에서 공동 연습을 제안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 전직 대통령의 항의성 성명엔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북이 자신에 대해 핵 문제 관련 '얼빠진 궤변'을 했다고 힐난한 데 대해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북의 "이렇게까지 무례하고 우매할 수 있느냐"는 등의 막말에도 문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침묵했다. 이런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남북 관계가 한 달도 안 돼 갑을(甲乙) 관계가 돼 버렸다"는 탄식이 나온다.

북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이에 정말 중요한 비핵화 논의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회담장에 나온 북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6·15 정신을 되살리자'고 한다. '핵'이 거론되지 않고 '우리 민족끼리'가 포함돼 자신들에게 유리한 1차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대표단은 한가롭게 날씨 얘기만 할 뿐이다. 북한도 동의했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9·19 공동성명, 2·13 합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김정은은 지난 1일 핵과 ICBM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남북대화를 제안할 때만 해도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까지 적극 호응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 '점프 한번 해 봐'라고 했을 때 1m만 뛰어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2m, 3m를 뛰려고 안간힘을 쓰니 기특할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몇 달 동안 미국의 B-1B 전폭기 편대, 항공모함이 접근할 때마다 지하시설로, 지방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설마, 미국이 공격하겠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털이 곤두섰을 것이다. 그런 김정은이 요즘은 평양 집무실에서 모처럼 긴장을 풀고 서울과 평창이 크게 표시된 지도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8/20180118029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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