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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정권 아래의 삶

기사승인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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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장막에 가려진 북한이 “위대한 후계자” 집권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최근에 온 탈북자들이 증언한다.

출처=워싱턴포스트

안나 파이필드, 도쿄 지국장

게재일 2017.11.17
Illustrations by Dominic Bugatto. Yoonjung Seo assisted in the reporting.
일러스트레이션: 도미닉 부가토. 추가 보도: 서윤정

 

북한에서는 국가가 도와줘야만 삶이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국가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살 수 밖에 없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도와줘야만 삶이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국가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살 수 밖에 없다.

혜산 출신 신부. 현재 23세. 2017년 5월 탈북 약 6년 전 김정은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많은 북한 주민들은 그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공산주의 왕조에 세대교체의 희망을 제시했다. 사실 그는 매우 젊었다. 2000년대에 성장한 신세대였다. 또 외부세계에서 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정권에 의해 “위대한 후계자”로 추앙되는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꼭 닮은 잔혹함을 드러냈다. 경제적 자유의 확대를 허용하면서도 그는 어느 때보다 더 엄격하게 나라를 봉쇄했고 중국 국경의 방위를 증강시켰으며 국경을 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또한 국내에서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신기루에 불과하다.

한국과 태국에서 이루어진 6개월 간의 인터뷰를 통해 워싱턴 포스트는 김정은 치하의 북한에서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지고 거주하다가 탈출에 성공한, 25명 이상의 북한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숯불구이 식당이나 비좁은 아파트, 혹은 호텔 방에서 이 난민들은 2011년 말 김정은이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뒤 북한 내부의 일상적 삶과 북한이 얼마나 변화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또 얼마나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의 어느 인터뷰보다 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다.

많은 탈북자들은 중국과의 국경에 가까운 북부 지역 출신으로, 이 지역은 북한에서도 가장 삶이 고되며 강을 통해 외부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가장 많은 곳이다. 또 이들은 탈출 시도와 관련된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된 비교적 소규모의 인구집단에 속한다.

비밀로 가득 찬 정권의 특성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 중 일부는 개별적인 확인이 불가능하며, 그들의 이름은 북한에 아직도 남아있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되지 않는다. 워싱턴 포스트는 탈북자 지원 단체인 노체인, 우리온, 링크를 통해 그들을 소개받았다.

고문과 감시문화 등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김정은 정권에서 보낸 일상생활의 고통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들이 그리는 북한의 모습은 한때는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이제는 완전히 붕괴된 나라, 전기나 원자재 없이 경제가 멈춰버린 나라이다. 그곳에서 북한주민들은 스스로의 길을 헤쳐나가며 대부분이 불법인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다. 요즘 북한에서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거의 없다.

북한에서의 삶이 변화하는 것처럼, 탈출의 이유도 바뀌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이제는 1990년대 중반 참혹한 기근이 발생한 뒤 15년여 동안 그랬던 것처럼 배가 고파서 그 전체주의 국가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환멸 때문에 북한을 떠나고 있다.

시장활동이 급성장하고, 동시에 중국을 드나드는 무역상들의 잡담이나 USB 에 저장된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보가 시장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수많은 북한 주민들에게 과거에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꿈을 불어넣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북한을 떠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공과 부에 대한 그들의 꿈이 북한 체제 내에서 좌절되었기 때문에 떠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하기 위해 떠나고 있다.

1부

김정은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정권을 잡았고 나는 그에게 큰 희망을 가졌다. 나는 그가 외국인 스위스에서 공부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가 그의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젊은 엄마

 

회령시, 29

2014년에 탈북

나는 그가 얼마나 젊은지 보면서 아마도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졌다. 우리는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인민반을 통해 약간의 배급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고기와 생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치원생

 

회령시, 7

2014년에 탈북

그 사람이 얼마나 뚱뚱했는지 기억나요. 얼굴이 돼지처럼 아주 뚱뚱했어요.

정권에서는 김정은의 후계작업을 준비하면서 “발걸음”이라는 노래를 발표해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배우게 했다. 그 내용은 김정은이 아버지인 김정일의 발걸음을 뒤따라서 국가를 영광스러운 미래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https://d21rhj7n383afu.cloudfront.net/washpost-production/DPRK_Today/20171114/5a0b2b83e4b0a79e0c263514/5a0efae7e4b0169f2f4a0436_1439412153584-wn5qra_t_1510931185952_640_360_600.mp4 (영상)

The North Korean regime composed the song “Footsteps” in preparation for Kim Jong Un’s succession.

 

송금업자

 

혜산시, 43

2015년에 탈북

우리는 “발걸음”이라는 노래를 들었고 외우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김정일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될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가 다섯 살 때 말을 탔고 세 살 때 총을 쏘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말들을 믿지 않았지만 웃거나 뭐라고 하면 죽음을 당할 테니 그럴 수 없었다.

 

대학생

 

사리원시, 37

2013년에 탈북

그 사람이 우리의 새 지도자로 소개되었을 때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농담인줄 알았다. 가장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일 가까운 친구들이나 부모에게만, 그것도 그들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 때만 말할 수 있었다.

 

마약상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나는 마음 속에서 김정은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품었다. 나는 그가 아주 젊기 때문에 북한을 개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정권을 잡고 그의 지배 아래에서 3년이 흐르고 나니 삶이 더 어려워졌다.

 

북한은 이론적으로는 국가가 집과 의료, 교육, 일자리 등 모든 것을 제공하는 사회주의의 보루이다. 그러나 실제 북한의 사회주의 시스템은 더 이상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공장과 들판에 일하러 가지만 그들이 할 일은 거의 없고 급여도 거의 전무하다. 반면에 필요에 의해 민간경제가 활발하게 일어나 사람들은 집에서 만든 두부를 팔거나 마약 거래, 국경 또는 뇌물을 통해 입수한 소형 DVD 플레이어 “노텔”의 밀매 등 각자의 방식으로 돈을 벌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다.

 

대학생

 

사리원시, 37

2013년에 탈북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중앙계획경제를 운영하지만 현재 주민들의 삶은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더 이상 정부가 물품들을 제공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 스스로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미용사

 

혜산시, 23

2016년에 탈북

나는 19세에 아버지가 병이 나면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사범대학을 중퇴했다. 그 후 집에서 사람들의 머리를 손질해주기 시작했다. 모든 여자들이 파마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보통 파마에는 30위안, 좋은 제품을 이용한 파마에는 50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돈을 벌기는 어려웠다. (30위안은 약 4.50 달러에 해당.)

 

농부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우리는 도시 중심지에서 살았지만 산 기슭에 있는 땅을 빌려 그곳에서 옥수수를 재배했다. 옥수수를 심고 수확하는 시기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걸어서 옥수수 밭으로 갔다. 점심이나 새참을 먹기 위해 잠깐 쉬는 시간은 제외하고는 저녁 8시까지 일하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뽑는 게 가장 힘들었다. 우리는 또 시장에서 콩을 사서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하루 수입은 5천원 (암시장 가격으로 60 센트)에 못 미쳤다. 하지만 콩 값이 자주 오르내렸기 때문에 이윤을 전혀 남기지 못할 때도 있었다.

 

https://d21rhj7n383afu.cloudfront.net/washpost-production/Unification_Media_Group/20171116/5a0d98a9e4b0f9506f8f3dbb/5a0efb24e4b0169f2f4a0448_1509128713498-xfd55s_t_1510931354289_640_360_600.mp4 (영상)

Footage taken by the DailyNK in 2017 shows scenes from a busy street market in Chongjin, North Korea.

 

콩 상인

 

혜산시, 23

2014년에 탈북

내게는 평양에 살면서 그곳 시장에서 콩을 판매하는 이모가 있었다. 나는 이모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들을 여러 농부들에게서 사서 전해주곤 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콩을 자루에 넣어 포장하도록 시키고 짐꾼들에게 돈을 지불해 역까지 운반하고 기차에 싣게 했다. 만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이모부가 군에 있기 때문에 그의 지위가 이모의 사업을 보호해주었다. 물론 집안의 주요 소득자는 이모였다. 북한에서 진짜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은 여자들이다.

현재 북한 주민들 중 수만 명이 해외에 나가 중국, 러시아 등의 나라에 있는 벌목장, 의류공장, 건설현장 등에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보통 그 봉급의 3분의 2가 정권에 넘어가고 노동자들은 3분의 1만을 가질 수 있다

 

건설 노동자

 

평양시, 40

2015년에 탈북

나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100달러의 뇌물을 주고 해외 건설 일자리를 얻었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졌다. 우리는 건설현장에서 살면서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고 여름에는 때로 자정까지 일하고 나서 기숙사로 가서 밥을 먹기도 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일했지만 일요일에는 조금 일찍, 저녁 7시에 일을 끝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그곳에 간 목적은 오직 돈을 많이 벌어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처음 봉급을 받았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천 루블이었다. 밤 10시에 일이 끝나고 상점에 가서 보니 맥주 한 병이 27루블이었다. 나는 와, 이제 부자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경제가 변화하고 경제를 다스리는 규칙들이 바뀌면서, 착취될 수 있는 애매한 영역들이 점차 늘어난다. 이에 따라 불법 거래와 활동들도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고 있다.

 

마약상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했다. 돈을 송금하고 전화로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남한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브로커로 일했다. 나는 그들이 중국에서 재회할 수 있게 주선하고 북한의 골동품을 밀반출하여 중국에서 팔았다. 인삼과 꿩을 중국으로 팔기도 했다. 그리고 얼음(마약)을 거래했다. 공식적으로 나는 공장 노동자였지만 뇌물을 주고 일에서 빠졌다. 북한에서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동전 한 푼도 벌 수 없다.

 

의사

 

혜산시, 42

2014년에 탈북

의사의 월급은 3,500원쯤 되는데 이 돈은 쌀 1 kg을 사기에도 모자란 액수이다. 당연히 의사는 나의 주 수입원이 되는 직업이 아니었다. 주 직업은 밤에 하는 밀수였다. 나는 북한의 약초를 중국으로 팔았고 그 돈으로 가전제품을 북한에 수입했다. 전기밥솥, 노텔, LCD 모니터 같은 제품들이었다.

 

 

농부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공식적으로는 학교에 가면서 돈을 낼 필요가 없지만, 교사들은 콩이나 토끼 가죽 같이 팔 수 있는 물건을 일정량 제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런 물건을 내지 않으면 계속해서 야단을 맞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게 된다. 부모가 여유 없는 형편이니 자식들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젊은 엄마

 

회령시, 29

2014년에 탈북

나는 내 딸을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 돌봐달라는 뜻에서 딸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들에게 돈을 주곤 했다. 한번에 120,000원씩 1년에 두 번 돈을 냈는데 이는 쌀 25kg을 사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교사들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어부

 

룡천군, 45

2017년에 탈북

나는 지도자 세 명 모두를 겪었지만 우리들 중 어느 누구의 삶도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김정은이 벌이는 여명거리 사업 (평양의 주거개발 사업) 같은 계획을 위해 돈을 내야 한다. 그 사업 때문에 정부에 가구당 북한 돈 15,000원을 성금으로 내야 했는데 이 돈은 4개월 치 봉급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마약상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내 주업은 얼음(마약)을 파는 것이었다. 그때 회령 시에 사는 성인의 70에서 80퍼센트 정도는 얼음을 사용했다고 본다. 내 고객들은 그냥 일반 사람들이었다. 경찰관, 보안요원, 노동당원들, 교사들, 의사들. 얼음은 생일 파티나 고등학교 졸업식 때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며, 남녀관계에도 큰 도움을 준다. 76세의 내 어머니는 저혈압 때문에 그것을 이용했는데 효과가 뛰어났다. 많은 경찰관과 보안요원들은 얼음을 하러 내 집에 찾아왔고 물론 나는 그들이 나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점심시간에 내 집에 들르곤 했다. 내가 사는 지역의 비밀경찰 책임자는 거의 내 집에 살다시피 했다.

“많은 경찰관과 보안요원들은 얼음을 하러 내 집에 찾아왔고 물론 나는 그들이 나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았다”

합법 또는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때로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평등한 사회주의 천국임을 선전해온 국가에 눈에 띄는 불평등을 가져왔다. 이것은 잠재적인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콩 무역상들과 마약 거래상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의 삶을 꾸려갈 전망이 있다. 공식적인 직업에만 종사하는 사람들은, 국영 타조농장에서 일하건 평양의 정부부처에서 일하건 간에 한 달에 몇 달러에 해당하는 돈 밖에 벌지 못하며 이 빈약한 봉급을 보충하기 위한 배급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부유층 자녀

 

청진시, 20

2014년에 탈북

스케이트 링크가 2013년에 개장되었고 롤러 블레이드가 큰 히트를 쳤다. 부유층 자녀들은 각자 소유의 롤러 블레이드가 있었다. 우리는 롤러 블레이드를 어깨에 걸쳐 메고 링크로 걷곤 했는데 이는 지위의 상징이었고 우리에게 돈이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내 롤러 블레이드를 장마당에서 샀다. 핑크색이었고 중국 돈으로 200위안이었다. 쌀 30 kg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건설 노동자

 

평양시, 40

2015년에 탈북

오랜 기간 돈을 받지 못할 때가 몇 번 있었다. 한번은 6개월 동안 전혀 봉급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는 건설현장에 있는 선적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하루에 쌀과 양배추, 달걀 한 개씩을 받았고 컨테이너에 있는 전기 코일로 요리를 했다. 일이 너무 고되어 단백질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장에서 싼 값에 파는 돼지 껍데기를 사기 시작했다. 씻는 것도 특별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목욕탕에 가려면 일을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두 달 동안 목욕을 못 하기도 했다.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그냥 우리가 사는 방식이었다.

“오랜 기간 돈을 받지 못할 때가 몇 번 있었다. 한번은 6개월 동안 전혀 봉급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부유층 자녀

 

청진시, 20

2014년에 탈북

휴대폰이 큰 인기다. 스마트폰을 사려면 집이 부유해야 했다. 우리 학교에는 물론 가난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아이들과는 놀지 않았다. 나는 400달러짜리 아리랑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이 내게 와서 말을 걸면 나는 그 아이들의 폰을 살펴보곤 했다. 버튼이 있는 구식 폰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장마당은 물품의 유통장소일 뿐 아니라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다, 소문, 불법 해외 매체.

 

농부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여자들은 장마당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좌판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장마당은 바깥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화 연결원

 

회령시, 49

2013년에 탈북

나는 장마당에서 구한 USB를 통해 많은 (밀반입된) 영화와 드라마들을 보았다. 집에 있는 TV에 꽂아서 시청했다. 배터리나 쌀 등의 일반 물품들을 파는 상인들은 USB를 카운터 아래에 숨겨놓고 있었다. 장마당에 가면 상인들에게 ‘오늘 뭐 맛있는 거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게 암호다. USB는 또 숨기기 쉽고 잡히면 부숴버리면 되니까 편하다.

“장마당에 가면 상인들에게 ‘오늘 뭐 맛있는 거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게 암호다.”

 

어부

 

룡천군, 45

2017년에 탈북

전에는 중국 영화를 USB로 봐도 괜찮았다. 남한이나 미국 영화를 보다가 걸려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제 김정은 정권에서는 중국 영화를 보다가 걸려도 강제수용소로 보내진다. 경찰과 보안기관과 정부관리들은 요즘 전보다 더 잘 산다. 더 많은 사람을 잡을수록 돈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십대 죄수

 

혜산시, 22

2013년에 탈북

나는 여덟 살 때 외국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항상 “아가씨를 부탁해” 같은 남한의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게 좋았다. 여자들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게 마음에 들었다. 북한은 매우 남성중심적인 사회이고 남자들은 여자를 돌봐주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또 화려한 차와 집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아코디언 연주자

 

함흥시, 25

2015년에 탈북

내 어머니는 시장에서 가전제품을 파는 일을 해서 DVD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중국, 인도, 러시아 영화와 수많은 남한의 연속극들을 보았다. 나는 남한에 가면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부

북한의 김씨 일가를 둘러싼 개인숭배가 얼마나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북한을 세운 국가 주석인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 손자이자 현 지도자인 김정은은 북한에서 마치 삼위일체의 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을 비판하거나 체제에 의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적어도 자신과 가족 전체의 자유를 희생시킬 것을 각오해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생명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

 

유치원생

 

회령시, 7

2014년에 탈북

저는 장군님과 김씨 일가에 대한 노래들을 배웠고 또 김일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배웠어요.

 

초등학생

 

룡천군, 7

2017년에 탈북

우리는 김정은의 생일에 선물로 사탕과 과자, 껌, 뻥튀기를 받았어요. 그런 과자들을 받으니 그 사람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는 그럴 때마다 교실에서 일어서서 “감사합니다, 김정은 장군님.”하고 외쳤어요.

“우리는 그럴 때마다 교실에서 일어서서 “감사합니다, 김정은 장군님.”하고 외쳤어요.”

 

대학생

 

사리원시, 37

2013년에 탈북

우리는 매일 90분 동안 사상교육을 받았다. 내용은 혁명사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수업들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왜 핵무기가 필요한지 배웠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희생해서 이런 무기들을 만들어 나라를 보호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들었다. 나는 이런 혁명사 이야기를 듣는데 진절머리가 났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동무”라고 부르는 것도 너무 지겨웠다. 나는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젊은 엄마

 

회령시, 29

2014년에 탈북

김정일과 김정은이 둘 다 거짓말쟁이이고 모든 것이 그들의 잘못이라 것을 다들 알았지만, 우리는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의견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가 술에 취해 김정은이 개새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의사

 

혜산시, 42

2014년에 탈북

마치 종교와 같다. 태어날 때부터 김씨 일가에 대해 배우고, 그들은 신이며 김씨 일가에게는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배운다. 엘리트들은 좋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체제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공포 정치 속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김씨 일가가 공포를 이용해 사람들이 계속 두려워하게 하기 때문에서 친목회 같은 모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고, 반란은 꿈도 꿀 수 없다.

 

건설 노동자

 

평양시, 40

2015년에 탈북

우리는 본 건물로 돌아갈 때마다 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린 큰 방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았다. 모두들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꽃다발을 사서 사진 앞에 놓았다. 그때마다 당원인 소장이 연설을 했다. 우리가 들은 말은 김정은이 이런 저런 일들을 했고 당과 국가와 인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정은의 시대가 올 때 까지는 그런 말을 믿었지만 이런 과장은 너무나 지나친 것이었다.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송금업자

 

혜산시, 43

2015년에 탈북

매달 김정은에 대한 특별한 지침이 내려졌다. 평양으로부터 마을 협회를 통해 내려왔다. 우리는 김정은이 모든 사람들을 돕고 잘 돌보기 위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김정은이 우리가 전기도 없이 옥수수쌀 (옥수수를 갈아 쌀처럼 만든 것)을 먹고 사는 걸 안다면, 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걸까?

 

콩 상인

 

혜산시, 23

2014년에 탈북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김일성이 김정은에게 사과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김정은은 나무를 통째로 뽑아오겠다며 삽을 달라고 했다. 이런 종류의 농담은 비밀경찰이 만들어낼 만한 이야기였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교육만이 아니라 그들은 이런 (정권에 대한 충성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만들어내곤 했는데, 그것은 이런 소문의 형태로 선전을 퍼뜨리는 게 더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방대한 규모의 감시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며 보위부라 불리는위협적인 국가보안부처에서 이러한 감시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면책권을 가지고 활동한다.

정권에서는 또한 일종의 이웃 감시제도를 운영한다. 모든 마을이나 도시는 30-40 가구로 이루어진 인민반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각 인민반마다 지도자가 주민들을 감시하고 서로 고자질을 하도록 독려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젊은 엄마

 

회령시, 29

2014년에 탈북

인민반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관찰한다. 어떤 가족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사는 것 같으면 모든 이웃들은 그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누군가 잘 사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이 그 집을 질투하기 때문에 모두가 예민하다. 부잣집을 파멸시키고 돈을 잃게 만들라고 굳이 누구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가족이 집을 잃는 것을 보면 속이 시원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있어도 절대로 과시해서는 안 된다.

 

농부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물론 나도 외부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중국이나 남한에 가고 싶다”고 말하면 누가 보안기관에 보고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생각은 해도 말은 할 수 없다. 누가 일러바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이 물건들을 팔러 북한에 자주 왔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인들이 돈을 잘 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중국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유층 자녀

 

청진시, 20

2014년에 탈북

청년동맹원들이 순찰을 하면서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지 않는지 찾으러 다녔다. 청바지 또는 스키니바지를 입고 있거나 매니큐어를 칠하거나 머리가 너무 길면 문제가 되었다. 어떤 때는 스마트폰에 남한 노래가 있지 않나 검사하기도 했다. 나도 노래 때문에 걸렸지만 맥주 20병을 사주고 빠져 나왔다.

“청년동맹원들이 순찰을 하면서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지 않는지 찾으러 다녔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정권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혹독한 벌을 받았다.

사기업 운영 등 경제 범죄로 기소된 사람들은 감옥에 가야하고 많은 이들이 손으로 직접 도로를 건설하는 등 힘든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김씨 일가나 체제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고발된 사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탄광에서 일하며 먹을 것도 거의 받지 못하는 처지에 빠진다. 북한의 연좌제 하에서는 한번 “반역자” 가족의 낙인이 찍히면 삼대가 함께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십대 죄수

 

혜산시, 22

2013년에 탈북

나는 16살이었을 때 할머니 댁에서 살고 있었는데 밤 늦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경찰관이 나를 경찰서로 데려가서 물었다. “네 부모는 어디 있냐?”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부모님은 실종된 상태였고 나는 엄마의 사업 동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엄마가 대규모 밀수계획의 주모자라고 죄를 뒤집어 씌웠을 거라고 의심했다. 경찰은 나에게 소리쳤다. “넌 네 엄마랑 똑같아. 너도 중국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겠지.” 그들은 내 따귀를 다섯 번이나 때렸다.

 

전화 연결원

 

회령시, 49

2013년에 탈북

내가 처음 감옥에 간 것은 사람들이 남한에 있는 친척들과 전화를 할 수 있게 도와주다 잡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4개월간의 노동형을 받았고 산비탈에 도로를 건설하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그 길이 전쟁이 날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자들은 땅을 팠고 여자들은 돌과 흙을 운반했다.

북한의 처참한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한 사람들은 여러 해에 걸쳐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 취급을 받았는지 들려주었고, 그 중에는 족쇄와 불을 이용한 중세식 고문과 가장 조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강제 낙태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인권운동가들은 이런 잔혹한 처우가 김정은 정권에서는 약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한 구타, 그리고 불편한 자세를 부상을 초래할 만큼 오랫동안 유지하도록 강요하는 등 일부 유형의 고문은 북한의 감옥이나 수용소에서는 흔한 일이며, 공개처형도 자주 실시된다.

https://d21rhj7n383afu.cloudfront.net/washpost-production/Liberty_in_North_Korea/20171115/5a0c63e5e4b0f9506f8f074e/5a0ef9e9e4b0302f30c3d276_1509128713498-xfd55s_t_1510931001207_640_360_600.mp4(영상)

"Jangmadang Generation" is a documentary by Liberty in North Korea featuring interviews with millennial North Koreans on their upbringing in the hermit kingdom.

 

십대 죄수

 

혜산시, 22

2013년에 탈북

나는 경찰에게 다시 심문을 받았고 그들은 엄마의 사업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그들은 또 다시 내 얼굴을 여러 번 때렸다. 항상 얼굴을 때렸다. 그 때 심하게 맞았다. 그리고 나를 벽으로 세게 밀쳐서 나는 벽에 머리를 부딪쳐서 피가 났다. 나는 아직도 가끔 두통이 난다. 내가 거기 있는 동안 그들은 내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계속 숙이고 있으라고 시켰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다리를 뻗으려고 하면 내게 소리를 지르고 때렸다. 나는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송금업자

 

혜산시, 43

2015년에 탈북

2015년에는 송금이 어려워졌는데 내가 돈을 준 여자가 잡혀서 나를 밀고해서 내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2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나는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때리고 머리를 들지 못하는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게 했다. 두 번은 내 얼굴을 때렸고 심문 중에 걷어차기도 했지만 심하게 맞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무시해도 될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누군가 그들에게 보복해줄 사람을 알고 있을까봐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

처벌에는 종종 굶주림이 포함되었고 이것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6세의 재소자는 감옥에서 몸무게가 13파운드 (5.9 kg) 줄어 출소했을 때는 88 파운드 (39.9 kg) 밖에 되지 않았다..

 

십대 죄수

 

혜산시, 22

2013년에 탈북

우리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밤 11시에 잠자리에 누웠고 그 중간에는 점심시간만 빼고 계속 시멘트 삽질을 하거나 자루를 운반하는 일을 했다. 점심은 주로 찐 옥수수였다. 나는 너무 겁이 나서 먹지도 못했다. 많이 울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전화 연결원

 

회령시, 49

2013년에 탈북

우리는 수용소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먹을 수 있었던 거라곤 약간의 옥수수쌀과 작은 감자뿐이었다. 내가 그곳을 나왔을 때는 영양실조에 걸려 거의 걸을 수도 없었다.

이와 같은 감옥과 강제수용소의 연결망, 그리고 처형의 위협이 주민들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북한에는 조직화된 반대도, 정치적인 반대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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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상

 

회령시, 46

2014년에 탈북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가족 모두가 벌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내 잘못 때문에 처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잘못하면 가족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이 고모부를 죽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반란이 일어날 수 없다.

 

대학생

 

사리원시, 37

2013년에 탈북

북한의 생존비결은 바로 공포정치이다. 왜 북한에서 공개처형을 하고 모든 통신을 봉쇄하겠나? 왜 북한 사람들이 가족을 다시는 못 만날 것을 알면서도 떠나겠나? 이 모든 사실을 통해 상황이 얼마나 나쁜 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빼앗겼다.

 

전화 연결원

 

회령시, 49

2013년에 탈북

만약 공개적으로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 즉시 체포된다. 그리고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의 가족 삼대가 벌을 받게 된다. 2009년에 나는 청진에서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날 뻔했고 관련자는 모두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당연히 겁을 먹게 된다. 그러니 체제를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하려 하기 보다는 그냥 떠나는 게 낫다.

일부 주민들은 떠나지만 그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국경 수비대들의 감시를 피해 철조망을 넘는 것은 믿기 힘들만큼 위험하고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국경을 넘는다. 일부는 중국에 남는데 그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으로 시골에 살고 가난해서 결혼하기 어려운 남자들에게 팔려간다. 일부는 잡혀서 북한에 송환되어 감옥이나 수용소로 보내진다.

 

북한 송환 된 아내

 

남포시, 50

2016년에 최종 탈북

나는 중국에서 20년 동안 살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밀고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북한에 송환되어 2년 반을 수용소에서 지냈다. (다시 한번 중국으로 떠난 뒤) 나는 다시는 송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내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으로 가는데 성공하는 북한 사람들이 매년 천 명 정도에 이른다. 대기근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3만 명의 북한 주민들만이 반도의 남쪽으로 올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는 탈북자 대부분이 기아와 경제적 필요 때문에 탈출했다. 그러나 시장의 놀라운 발전은 많은 이들의 삶을 개선시켰다. 오늘날 북한을 떠나는 주민들 중에는 가족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제에 대한 환멸 때문에 떠나는 이들이 더 많다.

 

아코디언 연주자

 

함흥시, 25

2015년에 탈북

나는 야심이 있었다. 당원이 되고 싶었고 당원이 되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즐기고 싶었다. 내 꿈은 돈을 많이 벌고 고위 정부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가족은 중국에 있었고 북한에서는 가족의 배경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내 꿈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어서 떠났다.

 

콩 상인

 

혜산시, 23

2014년에 탈북

나는 인생에서 발전을 원했고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중국으로 탈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상태로는 그냥 북한에서 그 위치에 그대로 머물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마도 이사도 하고 별 문제 없이 살 수도 있었겠지만 북한에서는 더 이상 장래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고기 배달원

 

은덕군, 23

2014년에 탈북

학교에서 우리는 우리가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배웠다. 하지만 졸업 후에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내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2년 동안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탈출에 대해 생각하자 마음속에서 큰 힘이 생겼다.

 

의사

 

혜산시, 42

2014년에 탈북

나는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은 외국에서 의사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일하려면 사상적으로 건전하고 탈북하지 않을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건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고 나는 거기에서 길이 막혔다. 나는 몹시 화가 났고 짜증이 나서 우리 사회를 욕했다. 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당원이었지만 그런데도 그 소망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건설 노동자

 

평양시, 40

2015년에 탈북

나는 3년 반 동안 일했지만 그 동안 2,000 달러 밖에 벌지 못했다. 우리는 최대 5년 동안 해외에서 일할 수 있었고 나는 10,000 달러를 벌어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뒤 나는 탈출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대학생

 

사리원시, 37

2013년에 탈북

나는 북한 체제에 신물이 났다. 나는 내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고, 심지어 내가 원하는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마치 감옥에서 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마을 지도자, 일반 경찰,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북한에서 무엇이 최악이었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건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라고.

 

 

출처:https://www.washingtonpost.com/graphics/2017/world/north-korea-defectors/korean.html?tid=english&utm_term=.be880209ffbd (워싱턴 포스트)

조선 @chosun.com

<저작권자 © NK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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