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비어 장례식, 미국은 지금… 강인선 특파원 신시내티 르포]

北核 무심했던 보통 미국인조차 "웜비어 죽음에 억장 무너져"

- 지난 5월 노르웨이 접촉
北외무성, 웜비어 상태 모른채 美와 인질석방 협상 테이블 앉아

- 6월 6일 뉴욕 접촉
北측, 웜비어 건강 체크하다가 혼수상태 뒤늦게 알고 자백

- 웜비어 다닌 고교서 '시민葬'
동네 입구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 리본과 성조기의 행렬

- 美국무 부장관 등 2500명 참석
조셉 윤 美대북특별대표, 유족에 文대통령 조전 전달

- 들끓는 여론에 美의회도 강경
"이젠 美·北간 '다음'은 없다" 대북 강경조치 쏟아져 나올 듯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귀국해 엿새 만에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장례식이 22일(현지 시각) 그가 다녔던 와이오밍 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시민장으로 엄수됐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이 학교 주변 가로수엔 이 학교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흰색 리본이 매여 있었다. 일주일 전, 17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웜비어를 환영하기 위해 친구와 동네 사람들이 매달았던 리본은 이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웜비어의 죽음은 극적으로 열릴 뻔했던 미·북 대화를 탈선하게 만든 핵심 사건이었던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장례식 하루 전날인 21일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북은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로 탐색전을 하며 접촉 창구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면서 "웜비어가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온 데다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제는 미·북 간에 '다음'이 없는 상태가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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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비어 모교에서 '마지막 인사' - 22일(현지 시각)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시신이 안치된 관을 그의 친구들이 운구해 장례식장인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와이오밍 고등학교 대강당을 나오고 있다. 와이오밍 고교는 웜비어의 모교다. 웜비어 관은 그가 안장될 신시내티의 스프링 그로브 묘지로 이동했다. 북한에 17개월간 억류됐다 송환된 웜비어는 귀향 6일 만인 지난 19일 사망했다. /AP 연합뉴스
오바마 행정부 때 대화가 없었던 미·북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접촉을 시도했다. 첫 시도가 지난 3월 초에 예정됐던 뉴욕 접촉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지난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을 화학무기로 암살하는 사건으로 미국이 강경 자세로 돌아서면서 이 접촉은 무산됐다.

2차 시도는 5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1.5(반관반민)트랙 접촉이었다. 이때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북의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과 비밀리에 만나 웜비어 등 북에 억류된 미국인 4명의 석방을 논의했다. 대외적으로는 1.5트랙 접촉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후에선 미·북 간 진짜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질을 매개로 한 대화의 물꼬가 터지는 듯했다.

하지만 6월 6일 뉴욕에서 미·북이 다시 만났을 때 북측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북측은 "사실은 웜비어가 좀 아프다"면서 그가 의식이 없는 상태임을 밝혔다고 한다. 이 관리는 "노르웨이에서 미·북이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북한 외무성은 웜비어의 건강 상태를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북 외무성이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를 논의하다가 도중에 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웜비어가 혼수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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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 넥타이 맨 웜비어 아버지, 아내 손 꼭 잡고… - 북한에 억류됐다 송환된 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아버지 프레드(앞줄 왼쪽)와 어머니 신디(앞줄 오른쪽)가 22일(현지 시각) 장례식장인 신시내티 와이오밍 고등학교에서 아들의 관이 영구차로 옮겨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버지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웜비어는 지난해 1월 북한에 관광을 갔다가 평양 한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고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됐다.

웜비어 가족이 사는 동네에 진입하면서 시작된 가로수 리본의 흐름은 끝없이 이어졌다. 골목길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성조기를 내건 집도 있었다. 한 교회엔 "오늘 밤은 웜비어를 생각하고 기도합시다"라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장례식은 이날 오전 9시 가족과 지역 정치권 인사, 웜비어의 학교 친구 등 2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됐다. 강당에 들어가지 못한 수백명의 시민들은 학교 체육관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웜비어의 장례식을 지켜봤다. 롭 포트먼 상원의원(공화)과 디나 파월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과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장엔 웜비어의 생전 학교 생활 사진과 북한에서 입었던 재킷 등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포트먼 상원의원은 장례식 전 기자들과 만나 "북한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았다"며 "(웜비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조셉 윤 대표는 이날 장례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웜비어 가족에게 보낸 조전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웜비어의 운구는 장례식 직후 인근 스프링 그로브 묘지에 안장됐다.
 
(왼쪽부터)생전엔 이렇게 건강했는데… ,北에서 재판받을 때 입었던 옷, 여권·학생증 등 유품들
(왼쪽부터)생전엔 이렇게 건강했는데… ,北에서 재판받을 때 입었던 옷, 여권·학생증 등 유품들 - 22일(현지 시각)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장례식장이 마련된 신시내티 와이오밍 고등학교 대강당 안에는 건강했던 웜비어의 생전 사진(위 사진)과 그가 북한에서 재판받을 때 입었던 옷(중간), 북한에서 사용한 여권·지갑·계산기(아래) 등 유품이 전시됐다. /신시내티=강인선 특파원
웜비어의 사망은 북핵 문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북한에 관심 없던 미국 보통 사람들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북한이 관광 갔던 대학생을 '반죽음' 상태로 보낸 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워싱턴에서 만난 한 택시 운전사는 "그동안은 남북한도 잘 구분 못 했는데, 의식 없이 실려온 웜비어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어이없는 죽음 앞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잔혹한 정권"이라고 했고,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의회도 분노하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와 북한 여행 금지 등 각 분야에서 대북 강경 조치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 상원 외교위는 22일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에게 비공개 브리핑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 대표가 이날 웜비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청문회는 일단 연기됐다.

트럼프 정부 관리는 이달 말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만일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제안할 생각이라면 웜비어 사망 이후 악화된 미국 내 대북 감정을 고려해 수위를 조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지난 13일 웜비어 석방 소식을 공개한 배경엔 '김정은의 친구'를 자처하는 미국 프로농구(NB A) 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을 미·북 관계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로드먼이 김정은과 만난 사실을 공개하며 마치 '비공식적으로 북한에 파견된 미국 대사'처럼 행세하는 것을 트럼프 정부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드먼이 북한에 입국하던 13일 웜비어의 석방을 발표함으로써 로드먼의 역할이 없었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3/20170623001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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