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인 부모 따라왔는데 고려인 4세는 법률상 외국인
성인 되면 강제 출국해야 하고 방문비자로 취업도 어려워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맞아 '유랑의 역사' 끝내고 품어야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손자까지만 핏줄로 인정하고 증손자부터는 남으로 취급한다면,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할 것이다. 혈연이란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그렇게 불쑥 중간에서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 고려인에 대한 우리 정책이 그렇다.

고려인이란 러시아를 비롯한 과거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 동포를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어로는 '카레예츠'로 불리고, 그들 스스로는 '고려사람'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말기 가난을 이기지 못해 연해주 남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이주한 우리 조상 60여 명이 최초의 고려인이다. 대략 1864년의 일이다. 이후로도 이주가 이어졌다. 대개가 농사를 짓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1937년 9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 이주됐다. 무려 17만명이 넘었다. 화물열차에 실려 30~40일을 이동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수천명이 도중에 숨졌다. 수만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중앙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이들은 땅굴을 파고 서로 체온으로 엄동설한을 견디며 피와 눈물로 황무지를 개간했다. 한국인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들은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자손을 낳아 길렀다.

그 후손들의 일부가 한국에 살고 있다. 뿌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법이 묘하다. 1992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 따르면 고려인 3세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한다. 한국에 함께 들어와서 한집에 같이 살고 있어도 고려인 3세인 부모는 동포로 대우하지만 자녀는 외국인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재외동포 비자(F4)를 받은 부모를 따라 동반 비자로 입국한 자녀는 25세가 넘으면 강제로 출국해야 한다. 같은 고려인 4세라도 부모가 취업비자(H2)라면 사정이 더 딱하다. 이 경우는 18세까지만 체류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아예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도 있다. 고려인 부모가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왔다면 살던 나라의 모든 것을 정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의 어린이집 모습. /조선일보 DB
그러니 부모와 살기 위해선 3개월짜리 방문 비자로 한국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다. 3개월에 한 번씩 외국을 다녀오자니 정신적·경제적 부담에 부모든 자녀든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다. 건강보험도 없다. 3개월 이상 체류해야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할 자격을 주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직장을 찾기도 어렵다. 아직 모자란 한국어 능력에다 학비 걱정으로 대학 진학도 쉬운 일이 아니다. 외국인 취급을 받으니 보육 지원도 전무하다. 고려인은 우리나라 국적이 아니기 때문에 다문화 가정에 지원되는 혜택만큼도 받지 못한다. 우리 젊은 세대의 인식도 크게 부족하다. 재미동포와 조선족은 알아도 고려인은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조부모, 부모는 조국을 잊지 말라며 지금까지 자손들을 키워왔다. 지금도 그래서 한국 성(姓)을 쓴다. 문 다나, 김 율라, 박 비탈리. 그 아이들을 우리는 모른 척해 온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다른 인종에다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로 이방인 취급 받으며 살아온 아이들을 정작 조국은 외국인 취급을 했을 뿐이다.

이제 이 아이들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자. 아이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찾아주자.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동포니까 동포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3세까지만'이라는 근거 없는 자의적인 규정만 고치면 된다. 저출산이라고 이민도 적극 받아들이자는 시대에 우리 핏줄을 외국인 취급할 이유가 없다. 통일을 생각하더라도 해외의 우리 동포들을 껴안아 나가야 한다. 이제 '유랑의 역사'는 끝내자. 그 옛날 강제 이주는 남의 나라에서의 일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나라가 생이별을 만들어선 안 된다.

마침 올해는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 그 아이들에게 따뜻한 선물 하나 해주자. "너희는 외국인이 아니야. 너희도 우리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8/20170618022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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