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불편해도 진실을 덮을 수 없다
결코 심일 소령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조국 위해 싸웠고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
 

 
 

모든 사람이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바로잡으려 할 때 상당한 난관을 각오해야 한다. 지난 6월 17일 칼럼 <北 탱크를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이 그런 경우였다.

'6·25 당일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육탄 돌격으로 북한군 탱크를 부순' 고(故) 심일 소령의 무용담이 허구(虛構)라고 썼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심일 소령은 '6·25전쟁 영웅'의 첫 줄에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릉 육사 교정과 원주 현충공원 등에 동상(銅像)이 서 있고, 육군에서는 매년 가장 우수한 전투중대장을 선발해 '심일상(賞)'을 수여해왔다. 이런 신화가 무너지는 걸 우선 군(軍)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과연 칼럼이 나간 뒤 국방부에서는 반박 보도자료를 준비했다. 어떤 부담을 느꼈던지 육군군사연구소에 대신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육군 측이 지시대로 발표했다면 해당 칼럼은 논쟁적 주장으로 그쳤을 것이다. '군(軍)은 과거에 저지른 허위 날조의 오류를 과감하게 바로잡아 정도(正道)를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라며 사실을 증언했던 이대용 장군도 우습게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의식 있는 개인의 존재는 상황을 반전시킨다. 육군군사연구소장(한설 준장)은 "사실 관계를 조사해본 뒤 발표하겠다"고 답변했다. 6·25전쟁의 영웅이고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로서 목숨을 초개같이 던졌던 이대용 장군의 문제 제기를 묵살하는 것은 후배 군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육군군사연구소는 당시 전투와 관련된 생존자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살아있어도 90세 이상이었다.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찾았다고 한다. 13명이었다. 이들을 면담하거나 통화했다. 놀랍게도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그날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국방부에서 '상반된 증언도 있다'며 인용해온 생존자 S씨(캐나다 거주)는 이제 답변을 회피했고 방문도 거부했다. 한때 그는 "심일이 그렇게 한 게 맞는다. 그의 중대장인 나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아야 하지 않나"라고 했던 인물이다.

심일 소령 무용담의 출처로 삼는 기존 증언들을 검증해봐도, 대부분 견강부회했거나 어떤 대목을 삭제해 왜곡해놓았다. 또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 '그랬다더라'는 전문(傳聞) 수준이었다. 군사연구소는 전투 상보, 작전 일지, 한국전쟁사, 개인회고록 등 40여 권을 검토했다. 북한 측 자료도 찾아봤다.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어디에도 그의 전공 기록이 없었다. 심지어 그가 소속된 7연대 약사(略史·1955년 간행)에도 나오지 않다가, 1978년 판부터 들어가 있었다.

옛날 교과서에는 '심일 소대장을 선두로 5인의 특공대가 북한군 탱크에 뛰어올라 포탑의 뚜껑을 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지고 뛰어내리자 불길이 치솟으면서…'라고 실렸지만, 당시 북한군 자주포(탱크)의 포탑은 뚜껑을 여닫는 구조가 아니었고 개방돼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또 5인의 특공대는 병적기록부와 상훈, 전사기록 등이 없었다.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한 달 반에 걸친 육군군사연구소 측의 조사 결과가 보고됐을 때 사실이 바로잡힐 것으로 알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국방부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육군의 조사 결과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나왔다. 국방부가 육군에 대해 감사하는 모양새가 됐다. 이들 중에는 심일 동상 건립에 관계된 이해당사자도 있었다.

국방부 측은 제6사단 미 고문관이 작성한 '심일의 은성훈장 추천서'(1950년 9월 1일)를 제시했다. 그의 전공(戰功)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라고 했다. "아들 셋을 잃은 심일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 훈장을 만들어줬다"는 이대용 장군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증거라고 했다. 개인의 증언보다 당시 문서가 더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태극무공훈장을 못 받은 이대용 장군의 개인감정이 작용했다" "군인의 모델인 심일 소령을 지금 와서 뒤엎는 이대용은 좌파다"라는 치졸한 말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은성훈장 추천서'의 공적에 나오는 날짜와 장소에서는 그런 전투가 없었다. 전투 당시 함께 있었다는 인물은 군적(軍籍)에 없었다. 증언 참관자의 명단도 없었다. 통상 훈장 상신은 소속 연대에서 하는데, 미 고문관 개인의 추천이었다. 추천한 고문관은 직접 전투를 목격하지 않았다고 했다. 심일 신화의 검증은 '공적(功績) 내용이 사실이 아니다'에서 출발했는데, 과거의 공적 기록을 갖고 '사실'이 라고 입증하려는 환원적 오류에 빠진 것이다. 국방부는 '심일 신화'를 지키려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진실이 불편해도 진실을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결코 심일 소령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조국을 위해 싸웠고 소중한 목숨을 바친 사실은 부정돼선 안 된다.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 과정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졌을 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1/20161201031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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